페미니즘의 ‘젠더’ 자연주의의 ‘섹스’ 모두 남·녀 이분법에 갇혀
생물학적 사실 통해 다양한 성 인정하고 ‘시원적 성’ 접근 가능
생물학적 사실 통해 다양한 성 인정하고 ‘시원적 성’ 접근 가능
티에리 오케 지음, 변진경 옮김/오월의봄·1만7000원 여성의 생식기가 있으나, 숨겨진 고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궁과 난소는 없고 중성적인 외모를 지녔다. 근육질 상체에 목소리는 중저음. 여성 평균치에 견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3배 이상 높다. 2009년 여름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800m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딴, 육상선수 캐스터 세메냐의 이야기다. 세메냐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중성스러운 외모 때문에 성판별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남성과 여성 모든 특성을 지닌 그는 ‘인터섹스’라는 판정을 받았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들은 인간에게 근본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성은 두 개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을 수도 있다.’ 비인간의 관점에서 성의 모습은 다양하다. 점박이 하이에나는 수컷과 암컷 모두 음경 형태의 성기를 지녔다. 타조와 같은 몇몇 조류는 성염색체를 구분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양서류와 어류는 온도 등의 영향으로 성이 결정된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무성생식을 한다. 생물철학과 생물사를 연구하는 티에리 오케 교수는 성의 이분법을 흔들어놓는 사례에 주목하며, ‘성은 다양하다’는 논증을 진행했다. 그 결과물이 <셀 수 없는 성>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대안자연주의’는 기존의 관점으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성을 발견하기 위해 티에리 오케가 택한 이론이다. 자연주의에서 성은 오직 여성과 남성 두 종류로만 구분된다. 이 관점은 많은 이들에게 과학적 사실이자 자연법칙으로 인정받고 있다. 페미니즘의 젠더연구 진영은 자연주의에 반대해 ‘사회적 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들에게 남성과 여성은 사회문화적 구성물일 뿐이다. 지은이는 기존의 자연주의는 인간의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물의 성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분화해왔다고 비판한다. 지은이는 페미니즘 역시 인류에게 준 영감은 인정하지만 생물학적 사실을 외면해온 젠더리즘에 갇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젠더에 몰두한 나머지 성을 생물학의 전유물로 넘겨버렸다는 뜻이다. 티에리 오케의 목적은 젠더이론과 기존 생물학을 모두 뛰어넘는 이론의 설계다. 그는 “젠더는 뚜렷한 이원성을 성립시키는 반면, 생물학적인 것은 넓게 분산된 다원성을 만들어 낸다”며 “생물학을 단순화하지 않고, 생물학의 풍부한 개념과 발견들을 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생물학을 사회질서를 만드는 데에 이용하는 시도와 선을 긋는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 관점에서 임신하려면 두 개의 생식세포 결합이 필요하다. 생물학의 설명력은 여기까지다. 인간은 인공자궁에서 생식세포를 태아로 길러낼 수 있다. 언뜻 철학서처럼 보이는 책엔 무수히 많은 과학적 사실이 나온다. 해마는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 임신한다.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 항상 새끼를 임신한다는 말은 어떤 동물에겐 성립되지 않는 셈이다. 생물학에서 성을 형성하는 층위 역시 다양하다. △유전자나 염색체의 성 △생식선의 성 △생식세포의 성 △내부 생식체의 성 △외부 생식체의 성 △호르몬의 성 △일반적인 외형의 성 △법적인 성 △정신적인 성 △리비도의 성까지. 지은이는 “자연의 성에 대한 우리의 암묵적인 이해는 상당 부분 암수를 생식 유형으로 정의하는 매우 광범위하고 취약한 정의를 받아들이게 만들지만, 그런 이해는 자연의 다양성 앞에서 무너져버린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으로 인간을 나누는 ‘성적이분화’ 논리는 그간 성소수자를 사회로부터 밀어내왔다.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의 죽음과 트랜스젠더 숙명여대 입학 반대 사건이 그 예다. 트랜스젠더도 인터섹스처럼 성은 두 가지라는 이분화 논리에 순응해야 했다. 지은이는 “(트랜스젠더는) 해부학적 성과 정신적 성 사이의 불일치를 밝혀야 했고, 순응하거나 일치시키도록 요구함으로써 해부학적 성과 정신적 성이 마침내 조화되도록 하는 담론만이 지지될 수 있었다”고 썼다. 한국사회는 트랜스젠더들이 해부학적 성과 정신적 성을 일치시키더라도 이들을 여성 또는 남성으로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은 어떤 존재이길래, 누군가는 성의 문제를 두고 죽음을 택해야 했을까. 여성과 남성이 완벽히 구분될 수 있을까. 한때, 남성이 성기가 너무 작게 태어나면 어린 시절 수술을 받아 여자아이로 자라기도 했다. 털이 많으면 남성적이라 하지만 남자보다 털이 많은 여자도 있다. 1m70㎝의 키는 남녀 모두의 키일 수 있다. 이처럼 ‘인터섹스 현상’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지은이는 발견하자고 말한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인 성기에도 교집합이 존재한다. 태아의 발달을 보면, 음경은 커진 음핵이고, 고환이 있는 음낭은 접합된 음순일 수 있다. 누군가는 생물학 논의를 끌고 오는 지은이의 논의가 기존 페미니즘 진영의 실천적 투쟁을 약화할 거라고 걱정할지도 모른다. 이런 우려에 책의 해제를 쓴 박이대승 정치철학자는 “대안자연주의는 젠더 연구의 반자연주의를 부정하고 자연주의로 돌아가려는 기획이 아니다”라며 “생물학을 자연주의로부터 구해내는 일. 자유로운 생물학을 통해 시원적 성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대안자연주의는 이분화된 성의 억압을 받던 이들을 조금씩 해방할 수 있을까. 세상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바뀌고 있다. 2017년 2월 청주지법 영동지원 신진화 부장판사는 외부 성기 성형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 ㄱ씨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했다. 신 부장판사는 “여성으로서의 성별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있어 외부 성기 성형수술은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시했다. 인터섹스로 드러난 캐스터 세메냐는 ‘여성’인 동료 육상선수와 결혼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고 있다. 그를 인터섹스인 레즈비언이라고 쉽게 정의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성은 2개도 3개도 아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 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성별 논란에 휩싸였던 육상선수 캐스터 세메냐(가운데)가 2009년 독일 베를린 세계육상경기선수권 대회에서 달리고 있는 모습.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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