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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린다는 우리 곁에서도 떠돈다

등록 2021-04-02 05:00수정 2021-04-02 09:23

저널리스트가 3년간 추적한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
집값 감당 못할 이들은 거리 떠돌면서도 희망 그린다

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엘리·1만7500원

“앞으로 몇 년 동안 사회질서에는 어떤 더 심한 뒤틀림이, 혹은 돌연변이 같은 변화가 나타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에 의해 파괴될까? 시스템을 벗어날 길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3년 동안 2만4140킬로미터를 여행”하며 제시카 브루더가 써내려간 <노마드랜드>에는 시종일관 이런 걱정과 두려움이 잔잔히 깔려 있다. 브루더는 2014년 미국 월간지 <하퍼스 매거진>에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라는 글을 기고했다. “점점 증가하는 미국의 노마드들, 풀타임으로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서브컬처에 관한 잡지 기사”였다. 이때 “예순네 살 할머니” 린다 메이를 만났다. 기사를 쓸 때만 해도 계획에 없던 이 책은 “3년의 집필 기간과 수백 건의 인터뷰”를 거쳐 세상에 나왔다. 브루더는 린다가 “할부금 분납하듯 야금야금 풀어놓”은 이야기를 비롯해 ‘하우스리스’들의 여러 사연과 만났다.

그들은 ‘홈리스’가 아님을 강조한다. 지어진 집이 없을 뿐, 승용차나 밴, 캠핑카(RV)가 그들의 집이다. 린다 역시 언제 주저앉을지 모르는 지프에 작은 연노란색 트레일러를 달고 다닌다. 국립공원 캠핑장을 한 철 관리하는 등 최저임금보다 아주 조금 많은 임금을 받아 연명한다. 하지만 근무시간이 줄어들거나 예고 없이 해고되어도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는 대단히 불안정한 직업이다. 린다가 158㎝ 키보다 천장이 2㎝ 높은 트레일러에서 먹고 자며 떠도는 것은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풀타임 노동자가 공정시장 임대료로 방 하나가 딸린 아파트의 집세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여남은 자치주와 하나의 도시권밖에는 없다. (…) 수입의 30퍼센트 아래로 주거비용을 쓰면서 그런 아파트의 집세를 내려면 1시간에 최소한 16달러 35센트-연방 최저임금의 두 배가 넘는 액수-를 벌어야 한다.” 그들이 집을 버리고 대륙을 떠돌며 “계절성 노동을 해서 얻은 돈으로 연료 탱크를 채우”는 이유다.

이 책에는 노마드들의 극적인 사연이 가득하다. 2007~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한 세계 금융위기의 피해자들이다. 집을 압류당하고 예금과 연금 등 금융자산을 날려버리고 해고당하거나 사업을 망해 먹은 이들이다. “집값보다 높은 대출금을 갚으면서 남은 생을 보내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이혼과 가족해체, 질병과 사고 등으로 이어졌다.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타격을 입어 개인적 불행이 극대화했으나 사회안전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는 정해진 대로 하면 (학교에 가면, 직장을 얻으면,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사회적 계약이 있었”지만 “오늘날 그건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모든 걸 제대로 해도 결국에는 파산하고, 혼자 남고, 홈리스가 될 수 있”다.

노마드들은 대개 나이 든 이들이다. 린다 같은 미국인들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산이 버텨주는 나이보다 오래 사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나이 많은 미국인 대부분이 여전히 은퇴를 ‘휴식의 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말년을 보내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하다.” 지은이는 노마드들의 근경의 사연과 함께 책 곳곳에 이들의 삶의 모습을 원경에서 뒷받침하는 통계와 자료를 제시한다. 2015년 미국 인구조사는 린다의 상황을 보여준다. “혼자 생활하는 노인 여성 6분의 1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같은 연령대 노인 남성(149만 명)의 거의 두 배나 되는(271만 명) 수치다. 사회보장연금은 여성이 남성보다 한 달 평균 341달러 적게 받는데, 이는 총 지불급여세 분담금이 더 적기 때문이다.” “2015년, 여성들은 남성들이 1달러를 벌 때 여전히 80센트밖에 벌지 못했으며, 어린 자녀들과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무임금 노동을 할 가능성은 남성보다 높았다.”
&lt;노마드랜드&gt;가 원작인 영화 &lt;노매드랜드&gt;의 한 장면. 차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며 생활하는 ‘하우스리스’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마드랜드>가 원작인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차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며 생활하는 ‘하우스리스’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노마드랜드>는 위태롭고 비참한 삶만 추적하지는 않는다. 집을 탈출하여 길로 나선 그들의 행위는 “살아나가기 위한 방편”이며 “집세와 주택 융자금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시작된 것은 좀 더 위대한 무언가를 외치는 함성이 되었”다. 그들은 “망가지고 타락해가는 사회질서에서 빠져나온 양심 있는 이의 제기자들”이다. ‘홈리스’라는 법률적 규정을 그들이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홈리스는 “추방된 사람들, 낙오자들, 타자들,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 “우리 사회의 불가촉천민들”로 규정될 뿐이다. 지은이는 노마드에 대한 진실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혹독하고 영혼을 시험하는 종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힘겹게 싸우는 동시에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현실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경에 직면했을 때 적응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연대감을 찾으려는 인류의 놀라운 능력을 증명해준다.” 그들은 신기루를 버렸지만 여전히 희망을 좇고 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린다는 ‘어스십’(earthship·재활용 자재로 짓고 자급자족 가능한 친환경 집)을 지을 땅을 언급하며 말한다. “거기서 혼자 지내게 되진 않을 거예요.” 길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할 진짜 집에 대한 꿈은, 손쉬운 낙관이 아니라 힘겨운 희망의 징표다.

린다는 우리 곁에도 있다. 투기 열풍 속에 빈부격차는 커지고 안전망은 여전히 부실하지만, 꿈의 한 자락을 애써 놓지 않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받아쓰기’와 ‘기레기’로 소비되는 이 나라에 제시카 브루더가 몸소 보여준 저널리즘은 자극제이기도 하다. <노마드랜드>를 원작으로 조만간 국내 개봉하는 영화 <노매드랜드>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이달 말 열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작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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