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재일동포 3세 화가 홍성익씨
재일동포 화가 홍성익(65)씨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에 본점을 둔 ‘도쿠야마 물산’ 경영을 이끌었다. 지금은 그의 장남이 연 매출 천억원 정도인 이 회사 대표를 맡고 있다.
떡과 냉면, 김과 같은 한국 식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이 회사의 출발은 1948년에 성익씨 부친(고 홍여표)이 할머니(고 김양능)와 함께 시작한 ‘도쿠야마 상점’이었다. 상점이라지만 1964년까지는 점포도 없어 ‘떡할망’이라고 불린 할머니와 ‘찐빵의 달인’ 어머니(강재순)가 손수레에 떡을 싣고 집에서 1㎞ 이상 떨어진 쓰루하시역까지 가서 노점에서 팔았단다. 부친은 84년에 상호를 물산으로 바꾸고 방부제 없이 떡을 오래 보관하는 완전 자동포장 기계를 도입하는 혁신에 나섰다. 이 ‘도박’은 다행히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 불었던 한국음식 붐과 맞아 떨어져 사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최근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나 화가와 식품업체 경영자로 살아온 지난 삶을 회고한 책 <그림의 길, 음식의 길-서울과 평양을 왕래한 자이니치 화가·경영자의 회고록>(논형)을 펴냈다. 일본 언론인 가와세 슌지가 그를 인터뷰해 2년 전 일본에서 펴낸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지난 14일 오전 전화로 만났다.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타운에서 태어난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부친의 권유로 대학까지 총련 계열인 조선대학 사범대 미술학과를 다녔다. 그의 양친 모두 제주 4·3항쟁 때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에서 난 뒤 해방 후 제주로 갔던 부친은 48년 2월 총파업 때 경찰에 붙들려 모진 고문을 당했고 모친은 4·3 때 숙부가 학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단다. “총련 간부 활동도 한 부친은 2010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4·3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았고 모친은 2018년에야 그때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4·3은 우리 가족에게 금기어나 마찬가지였죠.”
만화가 좋아 미술을 전공한 그는 서오사카 조선 초·중급 학교 교사로 있던 80년에 본격적으로 미술을 하겠다고 결심했단다. 계기는 광주항쟁이었다. “광주에서 시민들이 자유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군부와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창작의욕이 솟았죠. 81년에는 광주항쟁을 주제로 60호 대작도 그렸어요. 학생들을 지원하는 아주머니 그림이었죠.”
광주항쟁 이듬해 조선학교 전임교사를 그만두고 미술 공부에 전념해 외국적 작가로는 처음으로 태평양미술전 태평양미술회상을 받았고 90년에는 일본의 신진 미술인에게 수여하는 권위 있는 야스이상도 받았다. 당시 그는 한국 화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조선 민화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끌어와 분단된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을 많이 그렸다. 81년에는 북한을 찾아 만수대창작사 작가로부터 2주간 조선화 특별교육도 받았다.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89년에 그의 인생을 바꾼 ‘기회’가 찾아왔다. 잠실 롯데미술관 개관 특별기획전 주인공으로 초대받아 ‘민족의 염원, 홍성익 작품전’을 연 것이다. 조선적 재일동포가 처음으로 남한에서 연 이 개인전에는 2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대성공이었다. 그 뒤로 한국에서 미술 공부를 제대로 하려고 조선적을 포기하고 한국적을 취득한 그는 다시 생을 변화시킬 ‘우연’과 만났다. 어려서부터 좋아한 오코노미야키(오징어, 양배추 등이 들어간 일본식 지짐 요리)가 너무 먹고 싶어 생활비도 벌 목적으로 89년에 대구 동인동에 가게를 냈는데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이어 오코노미야키용 소스 판로 개척 문제로 접촉한 풀무원과 손잡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완전 자동포장 떡과 냉면까지 만들어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가 이때 세운 덕산식품은 지금은 다른 사람 소유이지만 상호는 그대로 쓰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북한에 냉면 공장을 세우려고 300만 달러 투자 계약서까지 썼다가 유엔 대북 제재로 중단됐단다.
부모, 제주4·3 비극 피해 오사카에
노점서 떡 팔며 ‘도쿠야마 물산’ 키워
98~2015년 직접 이끌며 연 매출 천억원
광주항쟁 보며 전업 화가 꿈 키워
89년에 조선적 출신 첫 한국 개인전
2년 전 일본서 회고록 내고 한국판도
그는 오코노미야키 체인점을 하면서도 신촌에 화실까지 얻어 그림을 그렸지만 99년에 화필을 아예 놓았다. “89년에 저한테 정치 집회 참여를 요청했던 한 민중 진영 화가를 우연히 99년에 만났는데 ‘총련 출신 화가가 민주 진영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며 저를 ‘이 변절자’라고 비난하더군요.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재일 조선인을 이렇게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그는 4년 전 인두암 3기 판정을 받고 2018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코리아타운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보내고 있다. 이번 회고록 표지도 그가 2019년에 그린 ‘거짓과 진실2’이다. 추상의 느낌이 강한 그림이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최근 일본 언론의 한국 때리기나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보도를 보면서, 어떤 정보가 자신에게 왔을 때 이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머니조차 일본 언론의 한국 때리기 보도에 세뇌돼 ‘한국은 괜찮겠냐?’고 저한테 묻더군요. 참 무서웠어요.” 그는 “붓을 다시 들고 50여점을 그렸다”며 “부모님 고향인 제주에서 여건이 되면 전시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작년부터 부친의 유지를 따라 코리아타운 중앙상점가 회장도 맡고 있다. 이쿠노 코리아타운은 서쪽과 동쪽 그리고 중앙상점가로 나뉘어 있는데 앞으로 셋을 하나의 법인으로 묶어 자신이 2년 동안 이끌 구상도 밝혔다. “코리아타운 안에 재일동포 역사박물관이나 김치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한국 정부가 지원한다면 제 소유의 땅(120평)을 내놓을 생각도 있어요.” 그는 코리아타운 상인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재일동포의 지난 역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장사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며 말을 이었다. “코로나로 일본 전역이 어려운 데도 코리아타운은 상대적으로 손님이 줄지 않았어요.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일본 젊은이들과 한류 1세대 팬들이 많이 찾아요. 저도 놀랄 정도죠. 제가 어렸을 때 김치 같은 한국 식문화는 차별의 상징이었는데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좋아해요. 이렇게 된 데는 해방 후 일본에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우리 동포들이 궁리해 한국 음식 문화를 지키고 불고기나 호르몬(소나 돼지 내장을 이용한 요리) 같은 한국 요리 문화를 창출한 덕이 큽니다. 이런 역사를 알릴 공간이 필요해요.” 그는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 아이돌 댄스나 음악에 흥미를 느낄 때 한국과 일본의 지난 과거사를 알리는 장을 만들면 효과가 클 것”이라고도 했다.
그의 또 다른 꿈은 1세대부터 재일동포 주요 화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모은 재일미술관 건립이다. 한국에서 살 때 건립을 염두에 두고 부지도 사들였지만 소송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단다. “1세대 화가분들이 많이 돌아가셔 한군데에 보관하지 않으면 작품들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제주나 아니면 파주 예술인촌에 건립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최근 악화한 한-일 관계를 두고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일시적인 문제입니다. 한-일 관계는 긴 역사로 보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해요. 머잖아 다시 풀릴 것입니다.” 그는 네 자녀에게도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고 초등학교까지 한국계 학교를 보냈다. 일본에서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그의 답은 이렇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차별이 더 심했어요. 한국 이름으로 회사 취직도 못했어요. 그에 비하면 요즘은 천지개벽입니다. 외국 문화나 언어를 잘 알면 일본 기업들이 우대를 해줍니다. 한국 문화나 한국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헤이트(혐오) 문제는 있어요. 협력해 잘 풀어야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홍성익 작가가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타운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홍성익 작가 제공
홍성익 작가의 회고록 한국어판 표지. 표지화는 저자가 2019년에 그린 ‘거짓과 진실2’이다.
홍성익 작가의 1985년 작 ‘평화’. 논형 제공
홍성익 작가의 1987년 작 ‘기원(대화)’. 논형 제공
홍성익 작가가 1983년께 이쿠노 코리아타운에서 일을 마치고 쉬고 있는 한 어르신을 그렸다. 논형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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