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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19세기 일본인들에게 ‘근대 서양’ 가르친 책

등록 2021-04-16 05:00수정 2021-04-16 09:54

자유·국민교육·정부 등 일본 근대에 주요 개념 도입
유길준 ‘서유견문’ 비롯 개화파·문명개화론 등에 영향

서양사정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송경호·김현·김숭배·나카무라 슈토 옮김/여문책·3만3000원

유길준은 1881년 시찰단 일원으로 방일하여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운영하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공부하다가 1883년 귀국했다. 당시 일본에서 유길준이 접한 책 가운데 후쿠자와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은 초편(1866)만 25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초편 3권, 외편 3권, 2편 4권으로 이뤄졌다. 유길준은 자신도 이런 책을 써보리라 마음먹었다. 1884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여 1889년에 <서유견문> 원고를 완성했다. 후쿠자와가 설립한 도쿄의 고준샤(交詢社)에서 1895년에 간행됐다.

&lt;서양사정&gt; 초편(1866년) 속표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도서관 디지털컬렉션센터
<서양사정> 초편(1866년) 속표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도서관 디지털컬렉션센터

유길준은 <서유견문>이 “신문의 대용이 되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바깥 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히게 되기를” 바랐다. 후쿠자와는 <서양사정>이 “단지 한때의 신문 대용으로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 말했다. 유길준은 <서양사정>에 실린 ‘문명의 정치 6조’를 <서유견문>에 전재하면서 통치의 근본으로 소개했으며 2편 권2와 외편 전권을 많이 참조했다. 조선의 개화파, 문명개화론, 서양 제도‧문물에 대한 인식 등에서 <서양사정>은 빼놓기 힘든 텍스트다.

장인성의 <서유견문-한국보수주의 기원에 관한 성찰>(아카넷)에 따르면,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가장 많이 참조한 책이 <서양사정>이라는 사실을 <서유견문>을 평가 절하하는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그냥 베껴 쓴 것이 아닐뿐더러 필요한 대목을 취하고 유길준 자신의 생각을 넣었으니, 독자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

<서양사정>은 서양의 근대를 소개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서양 서적들을 발췌 번역한 것에 가깝다. 후쿠자와 자신도 초편 서문에서 “요즘 잉글랜드와 아메리카에서 출판된 역사지리지 몇 권을 살펴보며 그중에 서양 열국을 다룬 조목을 발췌해 번역했다”라고 말한다. 외편은 존 힐 버튼의 정치경제학 논저를 번역하고 다른 책들을 발췌 번역하여 보완한 것이다. 2편은 윌리엄 블랙스톤의 <잉글랜드법 주해> 축약판 일부와 프랜시스 웨일랜드의 <정치경제학의 요소> 등을 번역하고 일부 다른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서양사정>은 우치다 마사오가 세계지지(地誌)서들을 번역한 <여지지략(輿地志略)>, 스마일스의 ‘자조(Self-Help)’를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번역한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과 함께 일본의 이른바 문명개화기에 큰 영향을 끼친 번역서 베스트셀러로 손꼽힌다. 번역자 후쿠자와가 처한 상황은 쉽지 않았다. 동아시아 전통 용어에서 적절한 번역어를 찾기 힘들고 번역어가 성립되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서양 개념을 번역해야 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주석을 달아 그 곤란함을 말하기도 한다. “본문의 자주임의(自主任意)와 자유라는 글자는 제멋대로 방탕해 국법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과 교제할 때 신경 쓰거나 걱정하지 않고 자기 능력만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영어에서 이를 프리덤 혹은 리버티라고 한다. 아직 적당한 번역어가 없다.”

2편 머리말에서도 “타당한 번역어가 없어 역자가 곤란해 하는 일도 적지 않다”고 말하면서 ‘리버티’와 ‘라이트’ 번역 문제를 자세히 다룬다. “리버티란 자유라는 의미로 중국인의 번역에 자유‧자전(自專)‧자득(自得)‧자약(自若)‧자주재(自主宰)‧임의(任意)‧관용(寬容)‧종용(從容) 등의 단어를 쓰고 있지만 아직 원어의 의의를 다 담기에는 부족하다. (…) 라이트란 원래 정직이라는 의미로 중국인의 번역에도 정(正)이라는 글자를 쓰며 때로는 비(非)라는 글자와 대비해서 시비(是非)라 하는 경우도 있다. 바른 이치(正理)에 따라 인간의 직분을 다하니 바르지 않은 일이 없다는 취지다. 한문 번역에 달의(達意)나 통의(通義) 등의 글자를 썼지만 자세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서양사정>이 출간된 1860년대 후반 일본은 막부(幕府) 타도운동, 왕정복고, 메이지 신정부 수립 등 봉건 체제 해체와 근대 국가 수립이 숨 가쁘게 진행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 일본인들에게 근대 서양의 자유 개념을 인식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쿠자와는 자유 개념을 설명하는 데 무척 공을 들인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1891). 이 사진은 일본 최고액권인 1만엔권에도 담겨 있다. 근대 서양의 개념들을 소개한 &lt;서양사정&gt;은 일본 근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1891). 이 사진은 일본 최고액권인 1만엔권에도 담겨 있다. 근대 서양의 개념들을 소개한 <서양사정>은 일본 근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람이 천부의 재주와 능력을 활용함에 있어 만약 심신의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재주와 능력 역시 쓸모없다. 따라서 전 세계에서 나라를 막론하고 각 사람이 그 신체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천도의 법칙인 것이다. (…) 태어나자마자 속박 받는 일 없으니,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주자유의 통의는 팔 수도 살 수도 없다. 사람으로서 그 행동을 올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면 국법으로도 그 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없는 것이다.”

막부 체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근대 정부의 역할을 깨닫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후쿠자와는 ‘정부의 직분’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가산(家産)을 증가시키려는 데 다른 사람이 방해하면 법으로 이를 제거하는 것, 위생에 관한 법을 세우는 것, 가스와 물 공급, 교통과 건축 관련 규제 등 대단히 많다. 특히 국민교육에 대해 “정부는 학교를 세우고 교사가 될 만한 인물을 양성하며 그밖에 교육과 관련된 일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그 책임으로 한다”고 말한다.

<서양사정>은 책의 특성상 현대 일본어로 번역된 책도 없다. 19세기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연구자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다. 사실상 연구라고 할 수 있는 번역 작업을 통해 현대 한국어로 옮긴 번역자들의 노고가 예사롭지 않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허호 옮김, 이산),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이향철 옮김, 역사비평사) 등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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