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김태우 지음/창비·2만4000원
1951년 5월16일 밤, 전세계에서 모여든 한 무리의 여성들이 중국 선양을 출발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북한 신의주에 발을 들였다. 이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여성단체로 꼽히던 ‘국제민주여성연맹’(국제여맹·WIDF)의 초청으로 한국전쟁의 참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위원회였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 등 18개 나라에서 변호사, 정치가, 교수, 작가, 공기업 대표 등 전문직 여성 21명이 참여했다. 조사위원회는 10여일 동안 평양, 신의주, 원산, 신천, 안악, 남포, 철원, 개천, 희천, 강계 등 북한의 여러 지역을 조사한 뒤 <우리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조사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는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와 농촌, 생매장과 같은 집단 학살과 고문, 강간과 집단적 성폭력 등 20세기 최악의 전쟁으로 꼽히는 한국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소련과 공산당의 ‘선전 팸플릿’ 정도로 취급받았을 뿐이다. 주요 가해자로 지목된 미국 정부는 철저한 무관심과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한편 보수적 여성단체들을 활용해 조사위원회에 대한 비판을 부추겼다. 그 결과 공산권이 아닌 서방 국가 출신 조사위원들은 귀국 뒤 ‘빨갱이’ 취급을 받았고, 자리에서 내쫓기거나 소송을 당하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국제여맹은 조사위원회 파견을 이유로 유엔(UN)에서 모든 지위를 박탈당했다.
국제여맹 조사위원회가 북한 내 작은 마을에서 회의를 열고 있는 모습. 창비 제공
국제여맹 조사위원회가 신의주 문화회관에서 신의주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추측되는 사진. 조사위원들은 중국 선양에서 보안상의 문제로 지급받은 중국 인민복 복장을 하고 있다. 창비 제공
역사학자 김태우 한국외대 교수는 <냉전의 마녀들>에서 냉전에 휩쓸려 잊힌 국제여맹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여성주의 평화운동’의 시각에서 복원해냈다. 국제여맹 자료뿐 아니라 조사위원 개개인의 기록들을 면밀히 추적하고 기존 자료들과 맞춰본 결과, 전세계를 아우르며 다양성과 연대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해 나섰던 당시 여성들의 반전평화운동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이다.
<냉전의 마녀들>은 지은이가 천착해온 두 갈래 연구의 교차점에서 나왔다. 하나는 전작 <폭격>(2013)에서 드러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의 양상이다. 그동안 미국은 군사목표만을 제한적으로 공격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지은이는 미 공군 자료 등을 통해 중국군이 개입해 전쟁의 판도를 바꾼 1950년 11월5일을 기점으로 미 공군의 정책이 ‘초토화정책’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다. 전쟁 초기엔 금지했던 소이탄(燒夷彈)을 떨어뜨려 불바다를 만들고, 그 뒤엔 시한폭탄을 떨어뜨리는 등 거의 모든 지역을 ‘청소’했다. 조사위원회는 초토화정책이 휩쓸고 간 뒤의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사위원회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신의주, 토굴에 숨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주민들로부터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미 공군 자료에서 드러난 폭격과 피해의 규모는 조사위원회가 확인한 수준을 넘어섰다. 신의주시에는 1950년 11월8일 하루 동안 8만5천여발의 소이탄이 떨어져 5천명 이상의 사상자와 3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왔다.
다른 하나는 2차대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커진 반전평화운동이다. 전쟁과 파시즘이 얼마나 여성과 아이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 생생히 체험한 당대 여성들은 ‘반파시즘’과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활발하게 냈다. 이전 자유주의 여성운동과 달리,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여성주의 평화운동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지역 여성들과 서구사회 내 비백인 여성들의 ‘반식민주의’ 공감대까지 이끌어냈다. 194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여성대회 결과 국제여맹이 창설됐는데, 당시 40개였던 회원국 수는 1958년 70개, 1985년 117개로 늘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프란시스카 더한은 이를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 국제 우산조직”이라 평가했다.
한국전쟁 조사위원회 파견은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소련과 공산당이 획책한 이벤트로 볼 수 없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소련과 공산당이 국제 여론을 의식해 ‘북침’ 시나리오를 만들었어야 했을 정도로, 당시 반전평화운동의 목소리는 컸다. 실제로 조사위원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에서 고루 참여했고, 영국 출신 모니카 펠턴, 덴마크 출신 카테 플레론과 이다 바크만 등은 ‘보수주의자’에 가까웠다.
신의주 지역에서 여성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국제여맹 조사위원들. 창비 제공
강원도 원산의 폐허 속에서 어머니의 목관을 껴안고 울고 있는 북한 지역 여성. 창비 제공
죽어가는 손주를 안은 채 남편과 아들이 미군에게 사살당했다고 국제여맹 조사위원회에 호소하고 있는 북한 지역 여성의 모습. 펠턴과 플레론의 개인기록에 등장하는 이 여성의 이름은 배운복으로 확실시된다. 창비 제공
지은이는 주로 펠턴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따라가는데, 조사위원들이 ‘미리 방향을 정해선 안 된다’며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으로 삐걱대거나 너무 잘 정리된 북한 주민의 증언에는 의구심을 품는 등 오롯이 ‘진실’만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발자취가 역력히 드러난다. 이들을 만난 북한 주민들은 무차별 폭격의 피해뿐 아니라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은 미군의 집단학살, 전시 강간, 여성들을 감금하고 집단적 성폭력에 동원한 ‘유곽’ 운영 등 실로 비참한 전쟁의 참상을 호소했다. 전쟁 후방 지역의 대표적인 폭력 양상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였다. 다만 지은이는 황해도 지역 민간인 집단학살은 미군이 아닌 우익청년대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지적하고, 조사 활동 당시 북한 당국이 통역을 통해 정보를 왜곡했을 가능성 등 한계점도 함께 짚는다.
조사위원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서도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미국을 주된 가해자로 지목했다는 이유로 조사위원회 활동에는 ‘소련과 공산당의 꼭두각시’라는 누명이 덧씌워졌고, 자유주의 진영에서 온 조사위원들은 개인적인 수난까지 당해야 했다. 영국의 뉴타운 개발공사 총재였던 펠턴은 해임당했고, ‘반국가적 인물’로 낙인찍혀 결국 제 발로 영국을 떠났다. 서독 출신 릴리 베히터는 대중연설에 나섰다는 이유로 기소당해 재판까지 받아야 했다. 전세계 여성들이 힘모아 틔워낸 평화운동의 싹을, 냉전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휩쓸어가버린 것이다.
“전쟁이 언제 끝날까요?” 지은이는 조사위원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을 들어,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체제를 상기시킨다. “전쟁은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처럼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볼 필요성은 여전하다는 되새김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안악의 집단매장지 공개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국제여맹 조사위원들. 창비 제공
죽어가는 손주를 안은 채 남편과 아들이 미군에게 사살당했다고 국제여맹 조사위원회에 호소하고 있는 북한 지역 여성의 모습. 펠턴과 플레론의 개인기록에 등장하는 이 여성의 이름은 배운복으로 확실시된다. 창비 제공
폭격 직후 폐허 위의 원산 시민들. 창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