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부키·1만8000원
역사책 읽기는 흔히 과거를 찾아가는 여행에 비유된다. 그러니 <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라는 긴 제목의 책에서 역사 서술을 예상한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뇌를 씻어내는 듯한 반전을 만난다. 역사책? 이 범주가 터질 듯 느껴진다.
고대 문명과 중세, 각종 전쟁터를 방문지로 제안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순간을 살펴보도록 권고하니 틀림없이 역사책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빅뱅의 순간과 공룡 시대를 안내하는 대목에서 역사의 범주를 뛰어넘어 우주물리학과 지질학의 카테고리를 넘나든다. 시간 여행, 타임머신의 이론적 배경도 등장한다. 그러니 이론물리학도 건드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행 가이드’도 있다. 어떻게 이동하고 숙박할 것인지, 예절과 태도는 어떻게 갖추고 옷은 어떻게 입고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질병과 전염병은 어떻게 피할 것인지를 담은 가상 ‘어떻게’도 가득하다. 독일 작가 카트린 파시히와 천문학자 알렉스 숄츠가 함께 쓴 책이기에 ‘1905년 시간 여행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발표 이후 110여년 만에 출간된 첫 본격 시간 여행 안내서’라는 너스레 넘치는 설명이 적절하다 하겠다.
역사책으로만 읽어낼 때 이 책의 놀라운 미덕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역사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 ‘만국 박람회’를 제시하는 장면을 보자. 만국 박람회는 “그나마 가장 무난하고 복잡하지 않은 과거 여행지 중 하나”로 추천한다. 1853~1854년 뉴욕에서 ‘만국 산업 박람회’가 열릴 때 초고층 빌딩이 없던 장면을 묘사하고 오늘날도 운행 중인 ‘스태튼 아일랜드 패리’가 이미 존재했으며 이후 에펠탑을 구상하는 데 모델이 된 ‘래팅 관측소’가 뉴욕 전망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다는 조언들은 신선하고 흥미롭다. 1881년 파리 ‘국제 전기 박람회’에 실험적인 전기 자동차가 출품됐고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프랑스 여러 식민지에서 데려온 흑인 400여명을 ‘빌리지 네그레’에 전시했다! 1893년 시카고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 땐 다양한 여성들이 별도 건물에서 열린 전시 행사에 참여했다. 이전 다른 박람회에서는 뜨개질이나 수공예 정도가 전시되는 데 그쳤으나 이때는 디자인·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여성의 작품을 소개했다.
주말여행지로는 그라나다, 나폴리, 스톤헨지를 추천한다. 서유럽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토후국은 “매우 탁월한 여행지”인데, 지금도 볼 수 있는 유적지 때문이 아니다. “무어인들이 유럽에 남긴 문화의 흔적을 단지 피상적으로만 느껴보고 싶다면 시간 여행을 떠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라나다는 14세기 중반 이후 100년 동안 ‘번영의 절정’을 맞이하는데, 이곳 출신 이븐 알카티브는 흑사병을 신의 형벌이라 여기는 널리 퍼진 잘못된 믿음에 맞서 싸우”고 도시 전역에서 시궁창 냄새가 풍겨난 런던과 달리 하수 시설이 갖춰져 냄새가 덜했다. 또한 “여성들은 주변 그리스도교 지역들보다 현저히 많은 권리를 누린다.” “문화와 자연이 (…) 극적 조화를 이룬” 18세기 후반의 나폴리, 석기 시대의 순례자나 천문학자를 만날 수 있는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0년의 스톤헨지(당시는 영국이 아니다)도 추천 주말여행지다.
수억년에서 수천만년 전 공룡 시대로 떠나면 ‘색다른 휴가’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쥬라기 공원>을 기대하면 안 된다. 여러 종류의 공룡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하늘엔 익룡이 날아다니고 땅에선 거대한 공룡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중생대 초반 3000만년 또는 4000만년을 건너뛰고 특히 2억년 전 무렵 소행성이나 혜성 충돌, 화산폭발 같은 대형 사건을 피해 중생대 말기로 가면 대륙의 분열로 다양한 종의 공룡이 확산하면서 전체적으로 볼거리는 많아진다. 우주관광도 시간 여행이다. 지금으로부터 45억~46억년 전으로 가면 지구는 마그마 불덩이일 뿐이고 거기서 더 과거로 가다 보면 지구는 작아지다 사라진다. 대신 그곳에 성운이 존재할 테다. 더 나아가 138억년 전으로 떠나면 검붉은 주황색으로 물든 우주공간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60만년을 더 돌아가면 빅뱅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우주선은 녹아버리고 이와 함께 시간 여행자들도 녹아” 사라질 테니까.
산만한 듯 종횡무진 재기발랄한 이 안내서는 역사와 과학은 물론 에스에프(SF)까지 버무려 놓았다. 굳이 모든 책을 범주로 구분하려는 고정관념은, 환상적인 시간 여행 앞에서 모두 무너져 내리게 된다. 역사적 통찰과 과학 지식에 기반한 묘사는 다시금 오늘날 인류가 이룬 문명의 위대함과 허위의식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특히 주류 역사의 선입견을 부숴버리는 시도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서양 중세 문명 하면 떠오르는 이탈리아나 프랑스가 아니라 아이슬란드로 가보라니. 여성의 여러 자유와 권리가 허용된 곳이며, 세계 최초로 의회를 만들고 쾌적한 삶의 환경을 이룬 곳이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깨알재미도 놓칠 수 없다. 가이드북에 맞춤한 의식주, 돈, 질병, 화장실 문제까지 술술 풀어놓는다.
책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젠더 인식’은 그리 놀랍지 않다. 공저자 카트린 파시히가 여성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여성의 권리와 자유로운 활동, 안전 등을 중요한 시간 여행지 선정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웬만한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언급들이다. 지은이는 영국 역사학자 이언 모티머를 인용하며 “아예 다른 방향에서 역사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과거를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상상하는 즉시,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가 시간 여행을 추천하는 1893년 시카고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 전시건물 조감도. 이 박람회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피크릴(PICRYL.CO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