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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꽃망울 터져 시가 빛날 때

등록 2006-02-02 20:01수정 2006-02-06 15:47

송기원 시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송기원 시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꽃시절’은 없었노라 탄식하다
부끄럽고 고단한 과거를 향해 손길 내미니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는 꽃봉우리 노래, 노래들!
색색깔 44편 꽃노래가 흐드러지게 피다
꽃이 예쁜 까닭은 그것이 유한한 데에 있다. 때가 되면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사시장철 한사코 피어 있는 꽃을 상상해 보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꽃이라면 더 이상 귀하거나 애틋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지겨워지지나 않을까. 이 꽃 저 꽃 다투어 피어 있던 꽃철에는 꽃이 귀한 줄 모르다가 꽃이 지고 없는 겨울에야 새삼 꽃이 그리워지는 심사에는 이런 곡절이 숨어 있다.

입춘이 코앞이라고는 해도 개화(開花)까지는 아직도 동안이 뜬데, 색색깔 갖은 꽃으로 화사한 시집 한 권이 반갑다. 송기원씨의 꽃 주제 시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랜덤하우스중앙)이다. 꽃을 노래한 시 44편에 화가 이인씨의 그림이 곁들여졌다. 송기원씨는 대개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1974년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함께 당선되었고 시집도 두 권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새 시집은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와 <마음속 붉은 꽃잎>에 이어 15년 만에 나왔다.

지난 가을 석 달 동안 술 익듯 시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노라고 당자는 밝혔다. 시집에 묶인 44편의 시 중 일부는 잡지에 발표도 했지만(<마음속 붉은 꽃잎>에 들어 있던 네 편의 꽃시도 다시 실렸다), 대부분은 시집을 통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새내기들이다.

“지나온 어느 순간인들/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어리석도다/내 눈이여.//삶의 굽이굽이, 오지게/흐드러진 꽃들을/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지나쳤으니.”(<꽃이 필 때> 전문)

시집 첫머리에 ‘서시’로서 앉혀진 작품이다. 시집의 제목도 여기서 왔다. ‘꽃시절’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쓸 때, 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고 화려한 무렵을 가리키게 된다. 누구에게나 꽃시절은 있을 터이다. 더 나아가자면, 꽃시절이 아닌 무렵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꽃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것이므로.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희에게 꽃시절은 없었노라 탄식한다. 시인이 꽃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자신의 그런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에 기반한다. 시집을 내고 기자들과 만난 그는 “어려서부터 ‘결손가정’ 출신이라는 데서 오는 자의식에 시달렸고 부끄러움과 자기 혐오가 퇴폐와 탐미로 나아갔다”며 “나이가 들면서 그런 자의식에서 자유로워지자 내게는 그런 상태가 바로 꽃으로 보였다”고 꽃시를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시인은 “얼핏 보면 정신분열증 같은 시집”이라고도 말했다. “불가의 선시 같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아주 야한 작품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

“시가 술 익듯 부글부글 끓었다”


이인 <배꽃>(한지에 분채, 아크릴릭, 37.0×24.0㎝)
이인 <배꽃>(한지에 분채, 아크릴릭, 37.0×24.0㎝)
시집에서 노래된 꽃들의 색깔이 다채롭듯, 꽃시들의 스펙트럼도 사뭇 넓다. 그렇더라도 꽃들의 함의를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성욕 또는 생명력, 그리고 염화가섭의 선적 깨달음으로 말이다.

꽃이 식물의 생식기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식일 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은 그 모양조차 여성의 생식기를 닮았다. 조지아 오키프의 저 유명한 꽃 그림들은 양자의 기능적·형태적 유사성으로 하여 설득력을 더했던 게다. 송기원씨의 꽃시들 역시 꽃의 에로티시즘을 다각도로 포착한다. 그것은 죽음조차 넘어서며 끌어안는 막강한 에로티시즘이다.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복사꽃> 전문)

“이를테면 내가 죽고/아직 앳된 네가/소복을 입었다 치자.//소복의 푸른 넋마저/요염에 물드는/봄밤.”(<목련> 전문)

깨달음·야함…정신분열증 같은 시집

한편, 염화가섭 식의 선적 깨달음이라 했거니와, 송기원씨의 꽃시들에서 그런 깨달음이 선험적으로 또는 탈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진흙탕과 오물 구덩이를 온몸으로 통과한 다음에야 얻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주정뱅이로 객사한 아비와/술집작부로 평생을 떠돈 어미”(<안개꽃>)가 시인의 가계사의 허구적 변형이라면, “자식을 감옥에 두는 일이 서툰/늙은 어미 하릴없이 목을 매네.”(<구절초>)는 그의 눈물겨운 자전소설 <다시 월문리에서>의 시적 버전이라 하겠다. 사생아라는 ‘저주받은 출생’을 질풍노도와 황음무도로 떨쳐버리고자 했던 젊은날의 몸부림은 시인을 일종의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덧 회갑을 한 해 앞둔 연치에 이른 시인은 이제 자신의 고단했던 과거를 향해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왜 나는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몰랐을까./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죽음이라고만 여겼을까.//(…)//천흥공단을 끼고 도는 시궁창 옆에서/비로소 안으로 열린 길을 더듬어들며, 나 또한/쌓인 눈 속에 온전히 모습을 감추네.”(<눈꽃 1>)

“그래, 가는 길이 허방이면 어떠하냐./눈부심은 눈부심만으로 눈부시다./네가 남긴 눈부심에 싸여, 오늘은/각시붓꽃을 바라보며 나도 눈부시다.”(<각시붓꽃>)

눈부심이 눈부시다는 말은 한갓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지만, 눈부심이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 역시 눈부시게 만든다는 것은 위대한 영향이며 포섭일 테다. 송기원씨의 꽃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가 목격한 눈부심이 오롯이 감염되지 않겠는가. 서두에서 서시를 소개했으니, 마무리는 시집 맨 뒤에 실린 작품으로 하련다. 송기원씨의 꽃시는 바로 이런 “노래, 노래들!”이니까.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무엇인지/자꾸만 자꾸만 넘쳐난다 싶을 때//달빛 가득한 뒷동산 동백숲에는/기어코 꽃봉오리가 터쳐나는 노래, 노래들!”(<동백꽃>)

시인은 이번 꽃 시집을 내면서 “예전 시골 다방에서처럼 시화전을 마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골 다방은 아니지만, 교보문고 강남점에서는 오는 16~26일 이번 시집에 실린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시화전이 열릴 예정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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