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강 해룡(왼쪽)과 아우 해진(오른쪽)이 해방 3년 전에 모친(윤초평)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윤초평은 아들 봉강이 세상을 뜨고 9년 뒤인 1978년 86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가운데는 봉강의 매제 안용섭 선생으로 전남대 법대 학장을 지냈다. “1942년에 해진 삼촌의 경성제대 동기인 김석형(역사학자)과 김수경(한글학자) 선생이 보성 우리 집인 거북정을 찾았어요. 그때 찍은 사진이죠. 삼촌은 그때 동경제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 그 대학 교복을 입고 있네요. 조모는 부친이 돌아가시고 찾는 사람도 끊기면서 말년에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어요. 그때 증조부(정각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친 것을 많이 후회하셨다고 해요.”(정길상) 사진 정길상씨 제공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문예중앙).
원로 언론학자 김민환(78) 고려대 명예교수가 3년 만에 낸 세 번째 소설이다. 몽양 여운형이 1947년에 창당한 근로인민당에서 재정부장과 중앙위원을 지낸 봉강 정해룡(1913~1969)의 해방 이후 생애를 그렸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나라를 구한 반곡 정경달(1542~1602)의 13대손인 봉강은 해방 당시만 해도 전남 보성의 3천석 대지주였지만 지금 집안에 남은 논은 네댓 마지기 정도다. 그는 일제 말인 1937년에 무상교육기관인 양정원을 설립해 나라 잃은 아이들 수백 명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해방 정국에선 ‘좌우합작’ 정치를 추구한 몽양의 듬직한 자금줄 노릇을 했다. 해방 직후엔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며 자기 집안의 노속 17가족에게 땅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사는 대지주이면서 진보적 정치의식을 가진 봉강과 그 집안사람들에게 가혹했다. 봉강의 6촌 이내 친족 8명이 한국전쟁이나 여순사건 등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국가 폭력으로 학살되거나 처형당했고 30여 명이 옥고를 치렀다. 눈을 감을 때까지 여운형 노선을 견지한 봉강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서 혁신계 정치 활동과 통일운동을 하다 두 차례 투옥당했다. 두 아들 춘상과 길상은 이른바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1980년)에 연루돼 춘상은 사형을 당했고 길상은 7년간 옥에 갇혔다. 형의 몽양 노선과 달리,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다 월북한 봉강의 아우 정해진이 60년대 중반 대남선전부 부부장이라는 거물이 되어 고향 보성으로 밀행했을 때 접선했다는 죄목이었다. 월북한 부모 대신 할머니가 보성에서 키운 정해진의 차남 훈상은 1969년 일본으로 밀항한 뒤 ‘법정 투쟁’ 끝에 이듬해 북으로 갔다.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표지. 문예중앙 제공
지난 7일 경기 고양시 정길상 선생 자택에서 함께 만난 김 교수는 이렇게 운을 뗐다. “봉강 집 이야기는 소설로 쓰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책으로 쓰려면 다섯 권 정도는 필요했죠. 나로선 감당이 되지 않았는데 제 두 번째 소설이 2018년에 나온 뒤 친구 천영세(17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나 이원보(노사발전재단 이사장)가 자꾸 그 집 이야기를 쓰라고 해요. 봉강 집안과 가까운 제가 그 집 이야기를 소설로 정리하면 좋겠다는 거죠.”
김 교수는 1961년 목포 해양고에 들어가면서 봉강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연좌제로 진로가 막힌 봉강의 조카 훈상도 같은 해 학비가 무료인 해양고에 입학했다. 봉강의 막내아들 정길상(75) 선생은 김 교수의 고교 3년 후배다.
“1학년 여름방학 때 훈상이 전남 장흥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그때 우리 집 족보를 보고 제 5대조 고모가 훈상네 집안으로 출가했다는 걸 알았죠. 그 뒤로 훈상이와 형제처럼 지냈어요. 고교 졸업 후에는 훈상이가 아버지가 보던 거라며 사과박스 두 상자 분량의 책을 저한테 주기도 했죠. 1945~48년에 나온 한국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책인데 제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훈상이 부친은 경성제대 철학과를 나와 동경제대 대학원을 다닌 수재였죠.”
월북한 훈상이 대남방송에서 그를 언급한 사실을 대학원에 다닐 때 뒤늦게 알고 놀라기도 했단다. “고대 신방과 대학원에 들어간 71년 무렵 오주환 교수가 불러 갔더니 정보 당국자로부터 들었다며 훈상이 대남방송에서 저를 거론했다고 해요. 제가 결핵을 앓아 힘들게 공부한 사실을 말하고 북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도 행복하게 잘 산다고 선전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듣고 기자의 꿈을 완전히 접었죠.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데모로 이미 정학을 당한 데다 대남방송까지 나왔으니 기자 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는 소설에서 봉강을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인품을 갖춘 ‘덕인’이자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간 ‘우국지사’로 그렸다. 예컨대 봉강은 양반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만나면 먼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봉강은 또 후환을 예상하면서도 1950년 인민군 치하에서 보성군 회천면 인민위원장을 맡아 우익에 대한 좌익의 보복을 최소화했다. 이 말에 정 선생이 소설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라며 덧붙였다. “근로인민당 사무국장을 한 이임수 선생이 부친을 두고 ‘저 양반은 한국의 톨스토이다’라고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기도 했죠. 부친이 오일장에서 2㎞를 걸어 집에 올 때 사람들이 다 피했다고 해요. 마주치면 먼저 부친이 공손례를 하니 받지 않으려고요. 집에 온 걸인이 됫박에 쌀을 받고도 가지 않으면 ‘뭐가 부족하십니까?’라고 묻고 현찰을 줘 보내기도 하셨죠.” 말을 이었다. “박정희 정부 때 부친을 사찰한 경찰이 김영삼 정부인 94년에 퇴직을 4개월 앞두고 앞장서 봉강 추모비를 세웠어요. ‘인품이 너무 훌륭한 분을 괴롭혔다. 죽어서라도 용서받고 싶다’면서요.”
김민환 교수와 봉강의 막내아들 정길상 선생(왼쪽부터). 김 교수는 정길상 선생의 목포 해양고 3년 선배이기도 하다. “제가 해양고에 들어간 64년에는 집 형편이 무척 어려웠어요. 매일 식량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죠. 아버지가 항일운동과 통일운동에 전 재산을 써버려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없었죠. 그 때문에 학비가 무료인 해양고에 갈 수밖에 없었죠.”(정길상) 강성만 선임기자
전남 보성 3천석 대지주 ‘봉강’ 정해룡
여운형 근로인민당 재정부장 ‘자금줄’
두 아들 ‘삼촌 접촉’ 간첩사건에 ‘희생’
동생 정해진·그의 아들 훈상은 ‘월북’
장편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아들 정길상씨 “곧 나올 ‘평전’ 예고편”
봉강이 일제 후반에 사재를 털어 설립한 무료교육기관 양정원의 학생과 교사들. “1938년에 문을 열었는데 한 학년 60명씩 4개 학년이 있었어요.”(정길상) 사진 정길상씨 제공
소설에는 봉강 형제 말고도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렀고 해방 뒤에는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며 남로당 활동을 하다 토벌대 총에 맞아 숨진 봉강의 6촌 형 정해두도 등장한다.
저자가 셋 중 특히 봉강의 삶에 주목한 이유가 뭘까? “해방 이후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남과 북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서로를 적대시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불 보듯 뻔했죠. 전쟁을 막으려면 통일된 민족국가로 가야 한다는 게 몽양 생각이었요. 그는 양심적 지주와 지식인, 노동자, 농민이 함께하는 대중적 진보정당을 추구했죠. ‘반공만으로 안 된다. 좌우를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는 거죠. 당시로써는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었어요. 그 시절 지식인의 70%가 좌파였어요. 나머지는 우파도 아니고 세상에 별로 관심도 없었어요. 봉강도 확고하게 몽양의 길밖에 없다고 믿었고 그 길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저자는 “이승만을 싫어한 미국이 몽양을 한때 대안으로 생각했다”며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랐다면 통일된 민족국가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친은 분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늘 말했어요. 4·19 뒤 보성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도 ‘38마(귀)선을 하루속히 걷어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정길상)
만 50살 무렵 봉강 정해룡 선생. “5·16 쿠데타 이후 수감된 부친이 1963년 봄에 풀려나 찍은 사진입니다. 몸이 몹시 상한 상태여서 감옥 냄새가 사진에 배어 있어요.”(정길상) 사진 정길상씨 제공
지난 3년 동안 김 교수의 소설 집필을 자기 일처럼 도운 정 선생에게 소설을 어떻게 읽었냐고 하자 “올해 나올 봉강 평전의 예고편”이라고 답했다. “문영심 작가가 부친 평전 원고를 마무리해 지금 한홍구 교수가 감수를 보고 있어요. 올해 나옵니다. 부친이 1942년에 논 350마지기를 팔아 울산 철광을 인수한 뒤 경영이 어렵자 이듬해 처분하고 그때 돈으로 4만원을 회수합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4년에 무장 독립운동 지원을 타진하기 위해 만주에 다녀왔는데 이 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해요. 이런 내용이 소설에서 빠졌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부친의 모습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한 번도 너 이래선 안 된다고 지시하지 않았어요. 자식들이 스스로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환경을 만드셨죠. 식사할 때는 병자호란 때 강온파 대립과 같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대목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우리 의견을 묻곤 했어요. 가정생활이 역사적 교육의 장이었어요. 저는 살면서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거역하지 않는데 어떻게 제가 거역하겠어요?”
봉강의 사상과 인격의 뿌리를 궁금해하자 정 선생은 14대 조인 반곡 정경달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임진왜란 때 선산군수로 있던 반곡은 1592년에 의병을 모아 금오산 아래에서 왜군을 대파했고 2년 뒤에는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통정대부(문신 정3품 품계명)에 올랐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무릎에서 반곡이 어떻게 나라를 구했는지 교육을 받았어요. 4월 28일 이순신 탄신일에는 동네에서 기념행사도 했죠. 부친은 어려서 증조부(정각수)한테 직접 한학 교육을 받았어요. 증조부는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다 세상이 썩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집으로 와 한학 교육기관인 삼의당을 세웠어요. 양정원의 전신이죠.”
소설에서 봉강을 너무 긍정적으로 다뤘다는 지적도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저자는 “봉강에 대해 고향이나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욕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며 말을 이었다. “소설을 읽은 제 친구가 그래요. 동생 해진이 65년에 자기를 데리러 북에서 내려왔을 때 봉강이 아들 춘상을 대신 보낸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요. 아무도 가지 않았을 때 동생이 북에서 당할 곤경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그래도 북의 동생 집과 선을 그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요.”
김민환 교수의 목포 해양고 동기인 정훈상씨의 청년 시절 모습. 정길상씨 제공
이 소설을 두고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매주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주제를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론으로 확장하고, 전기적 성격의 기록을 문학작품으로 발전시키는 데 매우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고 평했다. 여기엔 한국 현대사의 저울대 위에서 극적인 운명을 맞은 봉강 집안사람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능숙하게 교직한 문학적 솜씨에 더해 인간과 세상을 향한 작가의 따스하고 균형 잡힌 시선도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세번 째 소설의 문학적 완성도를 자평해달라고 하자 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번에 줄이고 줄여서 720쪽을 썼는데 출판사에서 분권은 안 된다고 해서 120쪽을 다시 줄였어요. 그러다 보니 사실 자체를 줄일 수는 없어 제가 문학적으로 재주 부린 것을 많이 잘랐어요. 소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잘라낸 120쪽을 살리고 싶어요.”
계획을 묻자 김 교수는 “1년은 푹 쉬고 싶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이도 역시 있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쓸 것”이라고 답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