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전투적 고전주의자, 르네상스의 문을 열다

등록 2021-05-21 04:59수정 2021-05-21 10:12

[책&생각]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⑤피렌체의 고전주의자, 니콜로 니콜리

책에 대한 헌신으로 초기 르네상스 일군 ‘정신적 원동력’
극단적 호고주의, 고대 답습에 ‘아무것도 아닌 자’ 오명도

15세기 초반 어느 토스카나 농촌 마을의 풍경이다. 오랜 시간 땅속 깊이 묻혀 있던 무언가가, 힘겹게 밭을 갈던 농부의 쟁기 부리에 채기 시작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부서진 그릇이나 녹슨 쇳조각 등이었다. 운이 좋을 때는 형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대리석 조각상이나 값나가 보이는 옛 동전 혹은 작은 메달 따위가 눈에 띄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내팽개쳐지거나, 부수거나 녹여 담장을 수리하는 데에 쓰였을 쓸모없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횡재라도 한 듯 그것들을 깨끗이 닦고 누군가에게 가져가려 한다. 피렌체의 그 ‘괴짜’라면 볼품없어 보이는 그런 것들조차 틀림없이 후한 가격을 쳐줄 터였다.

마치 중요한 유물이나 유적이 ‘우연히’ 발견되는 흥미로운 일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은 15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한 인물과 관련해 우리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가 바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니콜리다. 니콜리는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고대인들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려 했던 말 그대로의 호고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심지어 당대인들에게조차 그는, 단순히 고대를 숭모하고 부활시키려는 것을 넘어, 이미 스스로가 “고대인”이 된 기이한 인물로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화를 넘어서면 역사가들에게 니콜리는 그 누구보다 신비의 베일로 뒤덮인 수수께끼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실제 그가 직접 남긴 문헌이나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니콜리는 그저 동시대인들의 문학저작이나 도덕논고, 그들 사이에 오간 서간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르네상스 지성에 관한 우리의 긴 이야기에서 한낱 주변적인 인물로 제쳐놓기도 힘들다. 고대의 서적과 글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대 어느 누구의 추종도 불허했고,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의 글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모하리만치 철저한 고전주의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필기체 기원 ‘휴머니스트 서체’ 만들어

이런 맥락에서 흔히 니콜리는 고전에 기초한 새로운 문화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의 문을 연 정신적 원동력이자, 그것의 면면을 흐르는 고전주의 전통의 정초자로 평가되곤 한다. 무엇보다 그는 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대의 문헌들을 찾고 발굴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다. 부유한 상인 가문의 첫째로 태어났지만 물려받은 대부분의 재산을 오래된 문헌이나 유물들을 찾고 구입하는 데 탕진해버렸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주변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을 정도였다. 특히 그는 희귀한 고서를 찾아 유럽 곳곳을 뒤졌던 당대의 유명한 ‘책 사냥꾼’ 포조를 지적·정서적 차원에서 응원하고 그에게 조언했으며, 포조는 자신이 찾은 고대의 책들을 니콜리에게 보내면서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도시로 가꾸어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낸 책들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랜 시간 망각 속에 묻혀 있었기에 판독조차 어려울 만큼 훼손된 경우가 허다했고, “무지한 중세 필경자들”의 손에서 고전 라틴어가 오용되기도 했던 탓이다. 이제 올바른 철자법과 문법에 맞추어 과거의 사본들을 바로잡아야 했고, 그 내용 또한 정확한 고대의 역사와 사실에 기초해 수정해야 했다. 니콜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철저한 고전주의자로서 그는 고전 라틴어의 어법과 고전지식에 입각해 그것들을 수용 가능한 텍스트로 손질했다. 당대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손꼽히는 브루니조차 한때 니콜리를, 적어도 라틴문학에 관한 한, 권위 있는 “심판자”요 “비판가”로 평가할 정도였다.

또한 책은 누구나 판독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이런 그에게 당대의 필사본에 남아 있던 고딕 스타일의 서체는 읽기 어려운 무지의 산물 그 자체였다. 일찍이 페트라르카는 이런 중세의 필체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어지러운 그림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며, 심지어 그것을 쓴 필경사조차 자신이 쓴 글을 읽을 수 없을 것이라고 조롱한 바 있다. 니콜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그는 포조와 함께 고대의 명문과 서책을 분석하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새로운 글씨체의 개발에 힘썼고 그 결과 이른바 ‘휴머니스트 서체’로 불리는 새로운 필체가 탄생했다. 니콜리가 직접 남긴 한줌의 문헌에서 우리는 오늘날 대부분 유럽언어의 필기체가 바로 거기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서 수도원에 기부…공공 도서관의 부활

발굴되고 교정되고 또 새롭게 쓰인 책은 이제 읽혀야 한다. 니콜리는 자신이 모은 책들을 학문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했고, 특히 젊은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책을 읽고 토론하도록 장려했으며 기꺼이 대여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특유의 호고적 관심으로 그가 여기저기에서 모은 고서와 문헌들, 그리고 대리석 조각에서 작은 세공품에 이르는 온갖 유물들이 그의 집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대의 한 인사가 그를 고전주의 휴머니즘의 “아버지”이자 “보호자”로 칭송했던 것은 그저 허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당대 피렌체인들은 도시를 방문한 외부인들에게 니콜리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이 휴머니즘의 도시를 경험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서관. 위키미디어 코먼스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서관.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무튼 1439년 그가 사망했을 때 누군가에게 빌려준 200여권을 포함해 대략 1000여권의 장서가 남았다. 죽기 전 그는 유언장을 남겨 자신의 책들이 한 개인의 소장물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서관에 모든 책을 기증하고, 코시모 데 메디치와 브루니 등이 포함된 특별위원회의 책임 아래 그것들이 학문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유지였다. 고대 이래 서양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공 도서관’이 부활하는 계기가 이렇게 마련되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르네상스 역사가들이 모여드는 메디치-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 바로 그곳에서 기원했다는 점은 그 의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르네상스기의 지식인들은 고전고대의 부활을 염원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책’이라는 타임캡슐의 도움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상한 꿈이었다. 르네상스 지성의 역사가 고전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전개된 글과 말의 향연처럼 보이는 것이 그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빛바랜 고서들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들을 어둠 속에서 구출했으며 또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니콜리는, 분명 르네상스의 이상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했던 초기 르네상스의 주인공이었다. 르네상스가 다른 무엇보다 책과 함께 시작했기 때문이다.

극단적 호고주의에 대한 엇갈린 평가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당대인들은 니콜리가 고전 애호가였다는 점에서는 결코 의견을 달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맹목적 고전주의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 또한 존재했다. 자신의 시대를 학문과 문화가 퇴조한 암울한 시대로 평가하면서, 니콜리가 당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거부의 윤리’로 빠져들었던 탓이다. 그에게는 고대의 세계가 암울한 현대에서 벗어나는 도피처였고, 결국 그는 오직 고대만을 망향하는 극단적 호고주의자, 고대의 문학적 관행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전투적인 고전주의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일까? 니콜리는 라틴어와 관련된 타인의 무지를 거세게 비판했으면서도, 실상 그 자신은 아무런 작품도 쓰지 못한 역설적인 존재였다. 평생 그의 편에 섰던 포조는 이것이 스스로 세워놓은 학문적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윤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옹호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말만 그럴싸한 아마추어 고전주의자의 지적 허영일 뿐이었다. 게다가 단테와 보카치오 심지어 페트라르카마저 주저 없이 비난한 니콜리의 태도는, 맹목적인 고대에 대한 숭상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소명마저 저버린 무책임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1430년대의 한 지식인이 그를 “우티스”(Utis), 즉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별명을 붙여 조롱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고상한 이상을 제시했지만 결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신기루 같은 존재라는 힐난이었다.

과연 고전은 현실의 도피처인가, 아니면 현실을 성찰하는 거울인가? 그즈음 휴머니즘과 관련된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당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니콜리는 베일 속에 숨어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지성을 이해하려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 베일을 들추어야만 한다. 적어도 초기 르네상스에 관한 한 ‘우티스’ 니콜리야말로 그 세계의 ‘얼굴 없는 황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15세기 초반 포조가 발굴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니콜리가 필사한 사본의 지면에 나타난 니콜리의 필체. 위키미디어 코먼스
15세기 초반 포조가 발굴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니콜리가 필사한 사본의 지면에 나타난 니콜리의 필체. 위키미디어 코먼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