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책거리
10년 전 esc팀장 시절, 한두차례 휴가를 내고 여행기자의 취재 동선에 합류해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여행전문기자로 필명을 날린 이병학 선임기자는 매주 전국 팔도로, 때때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해외로 떠돌았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무척 많지만, 특히 놀랐던 것은 그의 낡은 자동차 트렁크에 쳐박혀 있던 내비게이션이었습니다. 방방곡곡을 누벼야 하는 여행기자에게 내비게이션이란 필수품이 아니었을까요?
“내비 없이 운전해야 여행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의 지시만 따랐다가는 기사를 풍부하게 구성하기도 쉽지 않겠다는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여행지보다 여정이 소중하다는 흔한 이야기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발터 베냐민도 ‘지도 없는 여행’을 말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봐야 그 도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혼돈을 정리해갈 때 나만의 질서가 형성되듯, 헤매가며 알게 되는 것들이 요즘 말로 ‘찐’일 겁니다. 흑산에 유배되어 <자산어보> 등을 짓고 섬에서 죽어간 정약전의 삶 역시 헤매는 삶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유배가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으나, 지금 있는 곳에서 마음을 골라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진면목으로 가는 길이리라 여깁니다. 조롱과 무시, 박해와 압제를 견뎌내는 일 말이죠.
‘코시국’이 언제쯤 마무리될지 모르지만, 백신은 희망입니다.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소음이 무척 요란합니다. 지도가 되어야 할 언론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혼란상만 키우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균형잡힌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백신의 도움을 얻어 여행지에서 헤맬 날을 기다립니다. 그전까지는 일단 책세상에서 하릴없이 헤매는 수밖에 없겠죠.
김진철 책지성팀장
nowher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