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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 민주주의’ 촉구하는 절박한 탈원전의 외침

등록 2021-06-11 04:59수정 2021-06-11 10:25

기술·권력·국가 등 망라해 원전 고찰한 ‘하이브리드’ 철학
원전이 만든 구조적 차별 넘어선 정치-사회 시스템 강조

탈원전의 철학
사토 요시유키·다구치 다쿠미 지음, 이신철 옮김/도서출판b·2만2000원

인류 최악의 대재앙으로 꼽히는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과학기술로 제어 가능하다”는 낙관론에 기대어 원전의 불가피성을 강변하는 목소리도 계속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원전이 언제라도 인간 전체를 ‘자기 절멸’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을 지닌 핵무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성장이나 기술 발전이 인간의 생존보다 앞서고 있는 도착상태, 곧 ‘예외상태의 정상상태화’가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탈원전의 철학>은 후쿠시마 사고 5년 뒤인 2016년 일본에서 사토 요시유키(50) 쓰쿠바대 교수와 다구치 다쿠미(48) 우쓰노미야대 교수가 함께 펴낸 책이다. 사토 요시유키는 미셸 푸코 등 프랑스 현대 사상으로부터 자신만의 이론을 벼려온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두 지은이는 이 책에서 철학과 여러 다른 분야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과학기술과 권력의 문제, 국가와 자본이 만드는 구조적 차별의 문제,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문제 등을 넘나들고, 이를 종합해 ‘탈원전의 철학’을 제시한다.

두 지은이는 원전에 대한 논의가 과학기술 영역에 가둘 수 없는, ‘권력-앎’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셸 푸코(1926~1984)의 개념을 빌리면, 권력은 무언가에 대한 앎을 만들어내어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결합관계를 이룬다. 애초 국가 권력과 앎이 결합한 결과물이 핵무기 개발이고, 이를 민생적으로 변용한 것이 원전이다. 핵무기와 다르지 않은 ‘절멸 기술’이라는 것을 가리는 한편 경제적-사회적 비용에 맞게 이를 관리하기 위해, 권력은 다양한 ‘안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무인항공기에 의해 후쿠시마 제1원전 상공에서 촬영된 원자로 3호기의 모습.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3호기에서는 방사성 물질이 계속 누출되고 있었다. 연합뉴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무인항공기에 의해 후쿠시마 제1원전 상공에서 촬영된 원자로 3호기의 모습.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3호기에서는 방사성 물질이 계속 누출되고 있었다. 연합뉴스

후쿠시마 원전 사고 10주년을 앞둔 지난 3월 일본 후쿠시마현 도미오카마치의 ‘귀환곤란’(歸還困難) 구역에 오염제거 작업으로 수거한 토양과 풀 등을 담은 커다란 검은 자루가 임시 보관소에 쌓여 있다. 연합뉴스
후쿠시마 원전 사고 10주년을 앞둔 지난 3월 일본 후쿠시마현 도미오카마치의 ‘귀환곤란’(歸還困難) 구역에 오염제거 작업으로 수거한 토양과 풀 등을 담은 커다란 검은 자루가 임시 보관소에 쌓여 있다. 연합뉴스

저선량 피폭과 관련한 ‘허용치’ 문제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후쿠시마 사고 뒤 일본 정부는 1밀리시버트로 되어 있던 일반 공중의 방사선 연간 피폭량의 한도를 20밀리시버트로 끌어올렸다. 이때 20밀리시버트라는 허용치는 국가 권력이 통치의 편익을 따진 결과일 뿐 과학적으로 도출된 결과와는 거리가 멀다. 이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방사능 오염에 따른 피난 지역을 후쿠시마현 하마도리 정도로 제한하고, 후쿠시마시 등은 피난 지역에서 제외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실제로 피폭이 인간에게 미치는 위험이 어떤지는 따지지 않고, “경제적-사회적 비용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피하고자 어느 정도로 인간이 암으로 죽을 가능성을 허용”하는 이데올로기가 발휘된 것이다. 이 같은 권력-앎은 원전의 도입에서부터 사고에 대한 우려의 불식, 사고 대처, 오염 지역으로부터의 피난과 귀환, 이에 대한 보상과 배상 등 원전과 관련한 시스템 전반에서 작동하고 있다.

원전은 ‘구조적 차별’을 만들어낸다. 원전이 지닌 위험을 분배하는 시스템 자체가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대재앙으로 번질 수 있는 사고의 위험 때문에 집단적인 피폭 위험을 줄이겠다며 인구가 적은 지방에 원전을 설치했던 것, 전력 관련 법률(전원3법)로 원전을 유치하는 지역에 인센티브를 주고 종속화시키는 것, 하청회사 노동자의 피폭량이 전력회사 사원보다 훨씬 많다는 것 등이 이런 구조적 차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데도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원전이 가동되어 온 배경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전후 일본의 ‘관리된 민주주의’를 결정적 배경으로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은 “표면적으론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간판을 내걸고 재출발했지만, 그 본질적인 구조는 공업=군사입국이라는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의거한 중앙집권적 통치로 계속되어왔다”는 것이다. 원전은 단순한 에너지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핵무기 재료인 플루토늄 생산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핵무기 생산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근대 일본이 전후에도 일관되게 추구해온 ‘식산흥업 정책’(공업입국)과 ‘부국강병 정책’(군사입국)의 핵심이었다.

두 지은이는 탈원전 철학의 이론적 배경으로 한스 요나스(1903~1993)와 자크 데리다(1930~2004)의 논의를 끌어온다. 요나스는 <책임의 원리>(1979)에서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고려한 윤리학을 주창했다.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 자신에 의한 제어를 넘어서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인간 그 자체가 기술의 대상이 되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자’만 고려하는 윤리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자’, 곧 미래 세대를 고려하는 새로운 윤리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래 세대를 통째로 위기에 빠뜨릴 ‘핵=원자력’은 가장 큰 문제거리다. 게다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라는 두 대재앙이 발생한 뒤, 우리는 다가올 대재앙을 걱정하는 ‘사전’이 아니라 이미 일이 벌어진 ‘사후’에 서게 됐다. 이 지점에선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에서 데리다가 “현재 시점에서 실현되어야 할” 절박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아 제기했던 ‘도래해야 할 데모크라시’ 개념을 참조한다. 도달 불가능한 ‘미래의 현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탈원전이 ‘절박하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탈원전 철학은 탈원전을 당위적이고 피상적인 수사에 놔두지 않고, 새로운 정치-사회 시스템의 필요성까지 제기한다. 일본 국민 77%가 탈원전에 찬성하는데도, 정치권은 아무런 의지를 갖지 않고 있다. ‘관리된 민주주의’의 한계, 곧 국가와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중앙집권적 통치 시스템을 휘둘러온 전후 일본의 핵심 문제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 ‘관리된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적이고 분권적이며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의거하지 않는 ‘근원적(radical) 민주주의’로 변혁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국가-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탈원전의 핵심이 된다. 두 지은이는 “모든 국민의 미래와 관련한 중요한 정책 결정에 관해선 국민투표 시행이 불가결하다”며, 국민의 ‘일반의지’에 따라 탈원전을 결정하자고 주장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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