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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혐오에 오남용되는 그리스 로마 고전

등록 2021-06-11 05:00수정 2021-06-11 16:02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드필’, 고전 인용해 여성혐오 정당화
문학적 은유 대신 ‘아전인수’ 문자 그대로 독해하고 차별 근거 삼아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
도나 저커버그 지음, 이민경 옮김/문예출판사·1만7000원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세계의 구성원에 대한 판단과 도덕관념이 현대와 다르던 시절, 노예제가 존재하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시절의 고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시대에 맞는 독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고전을 비판 불가한 성역으로 대하는 대신 시대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또한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주장은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식으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 차별적 관점을 과잉해석하지 말고, 고전이 전하는 핵심적인 주장 혹은 미적 가치를 탐구하라는 것이다.

오비디우스. 위키피디아
오비디우스. 위키피디아

어떤 상황에서 논란이 생길까. “완력은 여자들을 기쁘게 해./ 그들은 좋아해, 그들은 가끔씩 원해./ ‘원치 않는 것을’./ 난폭하게 낚아챈 비너스의/ 기쁨에, 심술궂음에 당하는 일은/ 서비스라 불리지.”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1권에 실린 글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모습을 바꾸게 하는 트라우마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강간이다. <변신 이야기> 중 50편이 넘는 이야기에 강간 내러티브가 포함되어 있고, 그 가운데 19편에는 무척 길게 상술되어 있다. 하지만 <변신 이야기>는 강간 이야기로 유명한 게 아니라 언어의 아름다움과 이미지의 풍부함을 운문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강간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비디우스를 자주 인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혐오와 백인우월주의의 ‘근거’로 오비디우스를 인용한다.
&lt;변신이야기&gt;. 위키피디아
<변신이야기>. 위키피디아

고전의 문학적 은유를 독해하는 대신 문자 그대로 읽어 차별적인 말과 행동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내용이 도나 저커버그의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에 담겨 있다. 도나 저커버그는 고전학자로, 2012년 그리스어·라틴어 교육에 중점을 둔 비영리단체 ‘파이데이아 인문학연구소’ 설립에 참여했다. 오빠인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 대표인 것을 포함해 남편 등 가족 구성원 중 소셜미디어와 관련된 산업 종사자가 많다는 도나 저커버그는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하위집단 ‘레드필’이 여성에 대한 분노를 바탕으로 형성한 담론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그리스 로마 고전이 수시로 등장한다.

먼저 레드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처음 등장한 ‘빨간 약’은, 영화에서는 실제로 알약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진실을 각성하게 하는 경험을 은유한다. 한번 깨달으면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빨간 약을 삼켰다”는 식의 표현은 한국에서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각성한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가 주로 다루는,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역시 정확히 ‘불가역적 각성’의 뜻으로 ‘레드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멤버들은 대체로 백인 남성이 억압받는다고 믿는 백인 남성이다. 이들이 고대 세계의 죽은 백인 남자를 궁극적인 지혜의 원천으로 바라본 결과 고전에 매료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심지어는 남성에게 여성을 유혹하는 법을 가르치는 픽업 아티스트가 오비디우스를 인용한다. “키스하는 법을 두고도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에 등장하는) ‘선생’과 오늘날의 픽업 아티스트들은 허락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한다.” <사랑의 기술>을 인용한다면 이렇다. “그녀는 주지 않는다. 그녀가 주지 않더라도 가져라!” 픽업 아티스트들은 여성의 경계를 침해해도 된다는 논리적 근거로 오비디우스를 인용한다.

레드필은 스토아 철학에도 매료되어 있다. 이쪽은 자기계발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스토아 철학을 쓴다. “마음챙김과 감사에 대한 자기계발적인 경향이 ‘새로운 무신론’과 양립하며 영성에 대한 넓은 정의와도 만났다는 점, 과도하게 연결된 세상에서 세계주의적 태도를 강조하는 스토아철학이 적절하게 소구”했다는 점 때문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에서는 스토아철학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문장들만을 일부 가져다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에서 “오늘 없앤 부정적인 속성은 무엇인가? 어떤 악에 맞서는가? 어떻게 더 나아졌는가?” 같은 대목을 실용성을 강조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세네카. 위키피디아
세네카. 위키피디아

고전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마케터 출신의 저술가이자 강연자인 라이언 홀리데이가 해석한 스토아 철학은 레드필 커뮤니티에서 인기가 많은데, 그가 학문과 동떨어진 인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레드필 남성들은 대학교수들이 좌파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학자인 도나 저커버그의 말에 따르면 “레드필이 사랑하는 철학인 스토아철학은 사실 학자들 사이에서 모든 고대 철학 가운데 가장 페미니즘적인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따라서 스토아철학을 옹호하는 주류 작가들은 이 학문이 안티페미니스트들로부터 언급되는 현상을 근본적인 오해 혹은 돌연변이로 여겨 무시했을 것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의 남성들은 가부장제 결혼의 모델을 뒷받침하기 위한 스토아철학의 자기 계발적인 매뉴얼부터 유혹에 대한 오비디우스식의 조언까지 활용했다. 도나 저커버그는 고전 연구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 학자로서, “고전이 부유한 백인 남성에 의해서만 읽히고 향유되는 세계로 돌아가지 않아야 하며, 학문의 미래가 과거를 닮지 않도록 고전학자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책이지만, 역자 이민경의 서문은 한국의 사례와 연결지어 읽는 독법을 제시한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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