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대형출판사들이 저널 구독료를 꾸준히 올려, 국내 대학 도서관들은 도서 등 자료구입비를 줄여가며 대응하다 결국 구독을 해지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바 있다. 서울의 한 대학교 도서관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지식은 본질적으로 공유재”라는 주장에 입각해 학술 논문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자는 ‘오픈액세스’(Open Access)가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국가 정책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17일 오후 ‘국가 오픈액세스 정책 포럼’을 열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연구비 집행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은 오픈액세스 활성화를 위한 연구 용역을 진행하고 지난해 8월 국가 차원의 오픈액세스 추진을 위한 협의회를 처음으로 개최하는 등 오픈액세스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온 바 있다. 그동안의 논의들이 모여, 이날 처음으로 오픈액세스를 국가적인 정책 차원에서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국외 저널들의 지나친 구독료 인상에 따른 대학 도서관의 재정 압박, 상용업체들이 주도하는 학술 논문의 상업적 활용과 연구자들의 이용 배제 등은 이미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 바 있다. 김소형 한국연구재단 학술데이터분석팀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그동안 학계 등에서 필요성이 제기되어 온 오픈액세스가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정책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오픈액세스는 “인터넷상에서 이용자 누구나 비용 지급 없이 학술 논문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허가 절차 없이 최대한 재사용이 가능한 상태”로, 2002년 ‘부다페스트 선언’으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됐다. 인터넷 시대에 기대했던 학술 논문의 자유로운 이용이 어려워지고 거대 상업출판사들이 출판·유통 플랫폼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폐해가 갈수록 심화되자, 지식의 공공성을 살리기 위해 제안된 운동이다.
다만 20여년 동안 전개된 운동에도, 상업출판사들은 연구자들로부터 논문출판비용(APC)을 받는 한편 대학으로부터는 막대한 구독료를 받아 이중적인 이익을 챙기는 등 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키워온 실정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전지구적인 협력을 통해 오픈액세스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새롭게 추진되고 있다. 2015년 제안된 ‘오픈액세스2020’(OA2020)이 대표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학술지에 지불되는 구독료를 논문출판비용으로 ‘전환’해 이중지급을 막고 대규모 저널들을 완전한 오픈액세스 저널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더해 2018년 선언된 ‘플랜 에스’(Plan S)는 일종의 실천전략으로 오픈액세스 ‘의무화’를 내걸었다. 정부나 공공의 연구기금으로 지원받은 논문은 오픈액세스 저널이나 플랫폼으로 출판하거나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리포지터리’(디지털 논문 저장소)에 즉시 기탁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방안이다. 현재 15개국 17개 연구기금지원기관과 7개 민간 연구기금지원기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등이 참여하고 있다.
‘플랜 에스’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오픈액세스 의무화에 대한 공감대가 모아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연구재단 오픈액세스 정책 수립에 관한 연구’에서 제안한 ‘한국연구재단 오픈액세스 2021’(안)은, 연구재단으로부터 지원받아 공공연구 성과물로서 논문을 출판하는 연구자에게 오픈액세스를 의무화하는 대신 논문출판비용을 지원해주는 것을 주된 틀로 삼고 있다. 이번 한국연구재단 정책포럼에서도 참여자들은 오픈액세스 의무화의 필요성과 이를 포괄하는 국가 차원의 정책 수립을 주된 과제로 지적했다. 발표자로 나선 서정욱 서울대 명예교수(의과대학)는 “정부와 관련 기관이 오픈액세스로 이행한다는 선언을 내고, 법제화를 통해 정부 지원 연구의 성과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등의 조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발표자인 김환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사무국장은 “기존 구독료를 논문출판비용으로 지불하는 방식이라면 5년 이내에 연간 국내 생산 논문의 84%를 오픈액세스로 전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이를 위해선 국가 차원의 강력한 정책 수립이 필요하며, “구독료 중심으로 되어 있는 교육부 재정을 국가 연구개발 재정의 오픈액세스 출판 비용으로 점진적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라 짚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경우 국외와 달리 대형 상업출판사가 아니라 소규모 학회들이 독자적으로 학술지를 출판하고 있고, 이에 드는 비용과 노동을 연구자와 학회가 자체적으로 감당하고 있다는 점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학에 소속되지 않은 강사나 독립연구자는 학술 논문을 자기 돈을 주고 봐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발표자인 대중서사학회장인 박숙자 서강대 교수는 국내 인문·사회·예술체육·복합 분야의 학술지 1829개 가운데 10% 정도만이 연구재단의 학술지 지원사업의 수혜를 받고 있으며, 지원율도 50%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공성 강화를 위한 오픈액세스 전환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더라도, 정작 상용 데이터베이스업체로부터 받는 저작권료 수입과 그들이 제공하는 플랫폼을 포기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실제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회 관계자들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학술지 출판에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출판비 부족”(편집실무진 및 조교 인건비 등 포함)과 “편집 및 출판 인력”이 가장 많이 꼽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출판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공공 인프라 모델, 연구자 중심의 지식공유 플랫폼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김소형 한국연구재단 학술데이터분석팀장은 “오픈액세스에는 연구자, 학회, 국외 출판사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어, 정부가 뚜렷한 정책적 방향을 세우고 이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내는 것이 앞으로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술지들의 현황 등 한국적인 상황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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