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만다라’. 안상수, 1998. “한글은 우주의 글자, 우주의 무늬입니다.”(안상수)
저명 디자이너 8명 대담집 ‘아시아의 책·문자·디자인’
‘조화롭되, 같지 않은….’
책을 디자인하는 한국과 일본, 중국, 인도의 저명한 디자이너들이 모여 책과 문자, 그리고 디자인의 갈 길을 이야기하는 대담집을 펴냈다.
아시아 디자이너 8명이 함께 참여해 만든 <아시아의 책·문자·디자인>은 여전히 서양식 디자인이 큰 흐름을 이루며 디지털과 영상이 문자를 밀어내는 요즘에 아시아의 책 디자인은 어디쯤 놓여 있으며, 따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고 답하는 전문가 대담집이다.
일본인 스기우라 고헤이(74·고베 예술공과대 명예교수)가 중심이 되고, 그와 대담을 나눈 한국의 안상수(54·홍익대 교수)·정병규(60·정병규디자인 대표), 중국의 뤼징런(59·칭화대 교수), 대만의 황융쑹(63·잡지 <한성> 발행인), 인도의 아르 케이 조시(70·전 인도 공과대 교수)·트리티 트리베디(58·산업디자인센터 교수)가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난해 10월 출판도시문화재단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책의 현재와 미래’ 심포지엄에 참여해 같은 주제로 발표하고 국내 출판·편집인들과 함께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대담의 중심 인물인 스기우라는 1950년대부터 ‘자기 증식하는 디자인’ ‘움직이며 변화하는 디자인’ ‘혼돈과 질서를 오가는 디자인’ 등을 내세운 독창적 수법들을 개척해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다.
이들이 대담에서 말하는 디자인의 세계는 ‘조화롭되 같지 않다’로 모아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존중하는 자세”다. 안상수는 한·중·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의 원리로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하고, 스기우라는 ‘얼룩을 만들어내는 문자’로서 ‘반’(斑)을 말하며, 뤼징런은 스승도 제자도 없는 ‘인경인’(人敬人)의 자세를 말한다. 한글, 한자, 가나, 데바나가리(힌디어) 모두 차이를 넘어 ‘같지 않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대담은 아시아의 책에 드리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넘어 아시아의 다양성을 좇으려는 아시아의 책과 디자인의 길을 보여준다.
스기우라는 우주와 감응하는 오감과 웅성거림의 디자인, 의표를 찌르는 디자인들을 말하고, 안상수는 천·지·인의 우주관을 담은 한글서체의 특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정병규는 한글과 한자의 관련성에 주목해 한글에 잠재된 상형문자의 성격을 탐색한다. 또 중국의 뤼징런은 전통적 수공예인 서화·공예·제본기술을 오늘의 책들에 재현하기를 즐기며, 황융쑹은 전통문화의 ‘혈’과 ‘기’와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활력과 드러나지 않은 마음을 책 디자인에 구현하고자 애쓴다. 인도의 디자이너들은 고대인의 수행과 깨달음에 닿아 글씨 안에 우주 근원의 웅성거림과 지혜를 담고자 한다. 이들의 독특한 책 디자인 작품의 사진들이 함께 실렸다.
정신의 그릇인 책에 틀과 꼴을 입히는 디자이너들의 섬세하고 독창적인 장인정신과 예술세계를 드러내는 대담은, 책에 대한 아시아적 전통과 현대의 시각을 보여주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박지현·변은숙 옮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 값 2만5000원.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눈물이 진주라면…가야·고’ 콘서트의 팸플릿. 한글을 연상하게 하는 한국의 격자문양과 조선시대 민화의 어울림. 스기우라 고헤이+아카자키 쇼이치,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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