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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세종 거닐던 경복궁 터…일제가 깔아뭉갠 흔적 드러났다

등록 2021-07-13 04:59수정 2021-07-13 14:08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동궁 남쪽 조선물산공진회 자취
박람회 건물 육중한 기둥자리들
육백년전 전각 흔적 무참히 파괴
“경복궁 상처 보존·활용 방안 고민”
지난 8일 경복궁 동궁권역 남쪽에서 화장실 유적과 함께 공개된 일제강점기 조선물산공진회 건물의 기둥 자리 흔적. 모래와 자갈로 초석 놓을 자리를 다진 ‘입사지정’ 기법을 썼는데, 기둥자리 위쪽에 시멘트 또는 콘크리트를 덮어씌웠다. 인근의 돌기단과 돌무더기는 조선 전기와 후기 경복궁 건물 유적들로, 일제가 경복궁 건물터를 마구 깔아뭉개면서 공진회 건물을 놓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8일 경복궁 동궁권역 남쪽에서 화장실 유적과 함께 공개된 일제강점기 조선물산공진회 건물의 기둥 자리 흔적. 모래와 자갈로 초석 놓을 자리를 다진 ‘입사지정’ 기법을 썼는데, 기둥자리 위쪽에 시멘트 또는 콘크리트를 덮어씌웠다. 인근의 돌기단과 돌무더기는 조선 전기와 후기 경복궁 건물 유적들로, 일제가 경복궁 건물터를 마구 깔아뭉개면서 공진회 건물을 놓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참혹했다.

오륙백년 전 세종대왕이 거닐던 옛 경복궁 터가 으스러진 몰골로 드러났다. 불과 100여년 전 일본인들이 500년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거리낌 없이 깔아뭉갰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 없는 유적의 실체로 증언하듯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 통치의 성과를 보여줄 근대박람회 건물을 세운다며 사람 키만한 너비 150~160㎝의 사각기둥 자리를 경복궁 옛 전각터 곳곳에 박았다. 작은 크기의 깬돌들로 건물의 초석을 놓을 적심을 파거나 아기자기한 모양새의 기단을 쌓은 조선 초 경복궁 전각들의 흔적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동서남북으로 열을 지은 일제의 육중한 기둥 자리에 마구 짓눌려 여기저기 흩어지고 폐허가 된 참상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난 8일 경복궁 동궁 남쪽에서 이런 참상의 흔적들을 다수 확인했다. 최근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복궁 동궁전 권역 남쪽에서 화장실터 유적과 함께 1915년 일제가 만든 조선물산공진회 기계관의 파일 기둥 자리들이 106년 만에 처음 발견된 것이다. 궁의 동쪽 관문인 건춘문 전각과 세종로 일대의 빌딩들이 원경으로 보이는 가운데 화장실 유적보다 더 남쪽 터에서 조선 전기 경복궁 전각터를 일본인들의 건물 기둥 자리가 깔아뭉갠 충격적인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흙과 모래를 다져 적심을 만들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씌운 육중하고 위압적인 기둥 자리가 남북축으로 15열, 동서축으로 15열이나 나와 있었다. 그 아래 산산조각 나거나 부서진 채 깔린 조선 초기 건물들의 돌 적심과 기단, 방화벽 등 시설 등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실 이날 언론의 주목을 받은 건 인근 동궁전 근처에서 나온 19세기 중건 당시 뒷간 유적이었다. 궁궐에서 나온 현대식 정화조 얼개의 화장실터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우리 근대사의 상처가 발견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릴 당시 출입문으로 쓰인 광화문의 모습. 문 앞에 일장기와 일왕가의 국화 문양 등으로 꾸며진 가설 장식문이 덧대졌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릴 당시 출입문으로 쓰인 광화문의 모습. 문 앞에 일장기와 일왕가의 국화 문양 등으로 꾸며진 가설 장식문이 덧대졌다.

조선물산공진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찍은 사진. 광화문 앞 큰길을 가득 메웠다. 약 두달간 진행된 공진회 행사를 당시 전 조선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166만여명이 찾아와 관람했다.
조선물산공진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찍은 사진. 광화문 앞 큰길을 가득 메웠다. 약 두달간 진행된 공진회 행사를 당시 전 조선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166만여명이 찾아와 관람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1915년 9월11일부터 10월31일까지 경복궁 내부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 최초의 공식 근대박람회였다. 한일병합 뒤 5년 사이 조선을 통치하며 이룬 근대화 성과를 과시하는 차원에서 각 도의 물산과 일본과 서구에서 온 갖가지 신묘한 근대문물들을 전시하고 조선 근대화의 현재와 미래상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무단통치의 입안자였던 데라우치 초대 총독은 이 관제 근대화 이벤트의 장소로 1896년 아관파천 이전까지 고종 황제의 거처였던 경복궁을 점찍고 1913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근정전과 경회루를 비롯한 대형 전각 몇개만 남기고 동궁전을 비롯한 숱한 건물들을 모조리 헐어버렸다. 총독부는 헐린 자리에 철도관, 미술관, 1·2진열관, 기계관 등 거대한 석조건물과 가건물들을 세웠고, 훗날 조선총독부미술관이 되는 미술관 앞에 프랑스식 정원을 조성했다.

이번에 발견된 육중한 기둥 자리는 바로 당시 근정전 옆 진열관의 흔적이다.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을 조감도처럼 그린 ‘공진회회장경복궁지도’란 당시 지도를 보면, 기둥 자리가 새로 발견된 공진회 건물터는 지도 한가운데 경복궁 근정전(2층 전각 건물) 오른쪽(동쪽)에 세로축으로 배치된 2동의 진열관 가운데 위쪽 건물인 기계관의 흔적으로 파악된다. 양숙자 연구소 학예관은 “기계관 아래쪽 기둥 자리 흔적만 드러났는데도 건물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화장실 위쪽으로 조사 범위를 확장하면 당시 공진회 기계관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을 담은 조감도. ‘공진회회장경복궁지도’란 제목이 붙어 있다.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을 담은 조감도. ‘공진회회장경복궁지도’란 제목이 붙어 있다.

지금까지 발굴 결과와 분석을 종합하면, 동궁 남쪽 권역은 경복궁 역사의 살아 있는 현장 박물관이 된다. 이번에 조선 초기의 경복궁 건물터 석조 유구들이 처음 본격적으로 대거 확인됐고, 그 뒤 19세기에 지어진 궁인용 대형 화장실과 궁성을 지키던 숙소터의 자취에 더해, 조선 초기 궁터를 깔고 지어진 조선물산공진회 기계관의 대형 기둥 자리까지 한자리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600년 역사를 담은 유적들이 현대의 광화문 빌딩군과 건춘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도 야외 유적 박물관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올해 30돌을 맞은 문화재청의 경복궁 복원 사업에서 역대 일관된 복원 기준은 조선 초기도, 20세기 근대기도 아닌, 1868년 중건 당시의 건물과 배치 구도였다. 1913~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중건된 지 5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대부분 파괴됐던 경복궁 권역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사업 시발점이 됐던 까닭이었다. 연구소 쪽은 “화장실 등 동궁 권역 남쪽 유적의 보존정비 활용 방안은 관련 부서와 협의해서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좀 더 능동적으로 이 유적의 보존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복궁 파괴의 흑역사인 조선물산공진회의 희귀한 자취일 뿐만 아니라, 보면 볼수록 106년 전 경복궁 파괴의 실상을 더욱 새롭게 추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유적의 가치는 지대하기 때문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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