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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시절 순종 혼례식, 400살 은행나무만이 증언하네

등록 2021-08-05 04:59수정 2021-08-05 08:01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서울공예박물관 들어선 안동별궁터 비사
교육동 옆에 서 있는 수령 400년 넘은 은행나무. 파란만장한 안동별궁 터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나무 너머로 송현동 숲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건물이 보인다.
교육동 옆에 서 있는 수령 400년 넘은 은행나무. 파란만장한 안동별궁 터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나무 너머로 송현동 숲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건물이 보인다.

조선 천지를 떠들썩하게 한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39년 전인 1882년 2월22일, 당시 도읍 한성 한복판이던 안국동 175번지 안동별궁에서 왕세자 이척(훗날의 순종 황제)과 순명왕후 민씨의 혼례가 치러졌다. 이날 오전 혼례복인 면복을 차려입은 세자는 경복궁에서 비를 맞아 종묘사직을 이으라는 부왕 고종의 명령을 받고 별궁으로 갔다. 별궁 마당에는 그 전해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배필로 정해진, 여흥 민씨 집안의 중신 민태호의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순종 황제의 순명효황후가 되는 민씨. 그는 부친의 인도를 받으며 왕세자 이척과 호화로운 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둘은 오늘날 율곡로 고갯길을 따라 가마를 타고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이날 예식은 재위 기간 내내 외세의 침탈과 왕실 내분으로 극한의 고뇌를 겪었던 고종에겐 생애 가장 기쁜 순간이었을 것이다. 앞서 부친 대원군의 세도를 끝내고 처음 친정을 실행한 고종 10년(1873년) 이듬해에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인 원자 이척이 왕비(민비)한테서 태어났다. 선왕 헌종·철종이 모두 왕비한테서 낳은 아들이 없던 차에 원자가 생겼으니 왕실과 나라의 드문 경사였다. 기쁨에 넘쳤던 고종은 돌을 맞은 원자를 곧장 세자에 책봉하고, 1880년 역대 왕실 왕족들의 최고 길지로 꼽혔던 안국동 홍주원 옛집을 크게 확장해 별궁을 지었다. 홍주원은 16세기 선조와 인목대비의 맏딸 정명공주와 결혼한 인척으로, 그의 집터는 선초부터 예사로운 곳이 아니었다.

별궁터는 원래 1450년 세종이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을 지어주려고 택한 길지였고, 그가 말년 머물다 세상을 뜨면서 왕족들이 선망하는 최고 거처가 된다. 그 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살면서 ‘연경궁’ 이름이 붙었고,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으로 폐위됐던 인목대비를 복권시킨 인조는 정명공주 내외에게 이 터를 주고 백칸 넘는 살림집을 지어준다. 공주의 자손들도 융성하면서 별궁터는 확실한 명당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안국동 로터리 쪽에서 찍은 옛 안동별궁. 궁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장대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안국동 로터리 쪽에서 찍은 옛 안동별궁. 궁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장대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1882년 열린 안동별궁의 결혼식은 오랜만에 나타난 적통의 혼례란 점에서 왕실은 물론 국가 최고의 역대급 경사였다. 혼례 규모는 조선 왕조사의 역대 궁중 혼례 중 가장 성대했다. 주단 등 주요 혼례 물품을 청나라에서 사들였고, 혼수용 이불만 500채가 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의 뜻깊고 성대한 결혼식은 불과 여섯달 뒤 왕실 개화정책과 부패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의 봉기인 임오군란으로 빛이 바랬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충격을 받은 세자빈은 순종 즉위를 보지 못하고 1904년 세상을 뜨고 만다. 기구하게도 순종 황제는 황제 자리에 오른 1907년 자신이 25년 전 가례를 치렀던 안동별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와 다시 혼례를 치르게 된다.

한일병합 뒤 안동별궁은 왕실 행사장 기능을 잃었다. 상궁과 궁중 종사자들이 지내는 처소로 바뀌었고, 천연두 백신 접종 장소로도 쓰였다. 30년대에 명성황후 집안인 민씨 일가와 광산왕 최창학 일가의 소유로 부지가 쪼개지면서 그 자리에 해방 뒤 풍문여고가, 1970년대에 건축가 김중업의 대표작 안국빌딩이 세워지게 된다. 지난달 풍문여고 교사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은 이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1950년대 풍문여고 교정에 남아 있던 안동별궁 건물들. 근대식 교사와 옛 별궁 건물이 이어지고 그 앞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조회를 하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1950년대 풍문여고 교정에 남아 있던 안동별궁 건물들. 근대식 교사와 옛 별궁 건물이 이어지고 그 앞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조회를 하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지난달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교육동 원형 건물과 그 너머 인왕산을 배경으로 보이는 송현동 땅의 푸른 숲 풍경.
지난달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교육동 원형 건물과 그 너머 인왕산을 배경으로 보이는 송현동 땅의 푸른 숲 풍경.

이 역사를 지켜본 증인은 살아 있다. 이곳 전시동과 교육동 사이에 자리한, 키가 20m 넘고 수령이 400년 넘는 장대한 은행나무 고목이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생장이 시작되어 별궁터에 깃든 역사를 말없이 목격했다. 두차례에 걸친 순종의 기구한 혼인 의식은 물론,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별궁의 전각들이 헐리고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합집산하는 것도 모두 지켜봤다.

지난해 옛 풍문여고의 담장을 헐면서 발견된 안동별궁의 담장 아래 기단석. 문화재위원회에서 노출 전시 방침이 결정돼 개관 뒤에도 드러난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옛 풍문여고의 담장을 헐면서 발견된 안동별궁의 담장 아래 기단석. 문화재위원회에서 노출 전시 방침이 결정돼 개관 뒤에도 드러난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다.

교육동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송현동 일대의 모습이다. 멀리 인왕산과 경복궁을 배경으로 푸른 녹음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교육동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송현동 일대의 모습이다. 멀리 인왕산과 경복궁을 배경으로 푸른 녹음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해 풍문여고 담장을 허물면서 새로 발견된 옛 별궁 담장의 기단석과 행각 터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으로 다시 묻히지 않고 드러난 모습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지금 박물관의 모습과 함께 과거의 자취를 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담장에 막히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옛 안동별궁 터와 이 터에서 바라보는 서울 북촌과 인사동 모습은 그동안 누릴 수 없던 경관들이다. 아울러 교육동 5층 꼭대기에서 이건희컬렉션 전시관 터로 유력한 바로 옆 송현동의 푸른 녹음을 멀리 인왕산의 자태와 함께 보면서 역사 무상을 절감하게 된다. 별궁터 미술관의 상설관과 기획전시실에서 이름 없는 과거 공예 장인들의 작업과 조선시대 명품 공예품을 감상하는 것은 덤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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