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동원(김성균)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데 걸린 시간이다. 비록 아파트보다 ‘투자 가치’가 떨어진다는 빌라지만, 그래도 서울 입성에 성공! 은행 빚은 무거워도, 그동안 장거리 출퇴근 하며 길거리에 내다 버려야 했던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아내 영이(권소현), 아들 수찬(김건우)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만을 위한 여유도 부려본다. 다만 ‘내 집 마련’의 성취감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집 안을 비롯한 건물 곳곳에서 ‘하자’의 징후를 발견하고 심란하다. 배우 김성균은 지난 2일 영화 <싱크홀> 언론시사회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캐릭터(동원)에서 중점을 둔 건 ‘보통 사람’이라는 네 글자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원네 가족이 둥지를 튼 장수동 청운빌라도 서울 시내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친근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1분. 11년 만에 마련한 ‘내 집’이 지하 500m 깊이 초대형 싱크홀로 추락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싱크홀은 땅덩어리가 갑자기 주저앉아 생기는 구멍을 뜻한다. 원래 싱크홀은 멕시코의 제비동굴, 베네수엘라의 사리사리냐마처럼 자연적인 지각변동으로 생긴 구덩이를 가리켰지만, ‘도심 속 싱크홀’은 대부분 상하수도관 문제나 무리한 굴착공사 등 인위적인 이유로 발생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5층짜리 청운빌라를 삼킨 초대형 구덩이의 발생 원인, 즉 참사의 사회적 원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2019년 개봉한 영화 <엑시트>처럼 재난과 코미디 장르를 혼합해,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유쾌 발랄한’ 대응력을 부각한다. 차승원, 김성균, 이광수 등 생활 연기와 코미디 연기에 뛰어난 배우 조합은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염두에 둔 캐스팅이다.
<엑시트>에서 청년실업과 직장 내 성희롱이 또 다른 ‘재난’이었다면, <싱크홀>에서는 ‘내 집 마련’의 버거움이 일상을 짓누르는 재난이다. 동원은 11년 만에라도 집을 샀지만, 같은 빌라 401호에 사는 이웃 만수(차승원)는 헬스트레이너·사진사·대리운전까지 ‘스리잡’을 뛰면서 월세 85만원을 내는 세입자다. 동원의 집들이에 왔다가 함께 싱크홀로 추락하는 직장 동료 김 대리(이광수)와 인턴사원 은주(김혜준)도 ‘무주택자’인 것은 마찬가지. 11년 만에 마련한 집이 지하 깊숙이 추락하고, 제집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인 이 사람들. 그래도 무척이나 긍정적이다. 이렇게 큰 사고를 당해보기 전의 일상 역시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던 것은 아닐까 싶게, 싱크홀에도 금세 적응한다.
빌라 한 동이 통째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컴퓨터그래픽(CG)이 다소 헐거워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추락 뒤에 꾸준히 발생하는 흔들림 등 추가 재난 장면들은 배우들의 표정·액션 연기와 긴밀하게 결합돼 한층 생생하다. 제작진은 건물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흔들림을 구현하고자 짐벌 세트 위에 빌라 세트를 만들었다. 배우 김혜준은 기자간담회에서 “땅이 흔들리는 걸 실제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세트가 흔들림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진짜처럼 연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중반까지 코미디가 강세였다면, 후반부터 재난 영화의 클리셰가 우위를 점하여 분위기가 달라진다. 연출을 맡은 김지훈 감독의, 108층짜리 초고층 빌딩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를 다룬 전작 <타워>(2012)의 일부 전개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가부장적 편견이 투영된 희생자 재현과, 재난 트라우마에 대한 헐거운 해석은 불편한 대목이다. ‘내 집 마련’ 자체가 재난 상황으로 여겨지는 ‘보통 사람’들에게 건네는 유쾌한 위로의 메시지에만 충실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하 500m라는 싱크홀 깊이 설정과 관련해, 김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깊이, 위를 올려다봤을 때 까마득한 느낌을 주는 깊이, 희망을 찾기 어려운 깊이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깊이”에 “서울 집값”을 넣어도 어색함이 없다. <싱크홀>은 그 까마득한 구덩이에서 살아 빠져나오려는 이들의 ‘웃픈’(웃기면서 슬픈) 사투기다. 11일 개봉.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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