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매일 정오에 시작한다. 오전에는 뉴스를 확인하고 방송 내용을 준비하느라 꽤 바쁘다. 며칠 전 그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방송 시작이 한시간도 안 남았는데 티브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 세트 스코어 2 대 2의 상황. 한국과 터키는 듀스에 역전, 재역전 등 흥행의 모든 요소를 선보이며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기를 이어갔다. 마침내 우리 대표팀이 4강 진출을 확정 짓는 순간, 환호와 동시에 머릿속에 이 노래가 재생되었다. 블락비의 노래 ‘헐’(Her).
“지저스, 무슨 말이 필요해? 모두 널 작품이라고 불러~♬”
어떤 종목에서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건 아득한 일이다. 스포츠 분야는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기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우리는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선수에게 더 큰 감탄과 존경을 표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연경만큼 높은 곳에서 오래 버텨낸 한국 선수는 없다. 프로 데뷔 15년(!)이 넘었는데도 그는 국제배구연맹(FIVB)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거듭 말했다. 한국의 김연경은 10억명 중 1명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우리가 스포츠 스타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먼저 미학적인 차원. 손흥민 선수의 환상적인 골이나 류현진 선수의 영리한 제구를 보면 “예술이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혹은 김연아 선수의 황홀한 연기를 떠올려보라. 이번 여자배구처럼 아슬아슬한 승부를 지켜보며 느끼는 스릴도 스포츠가 주는 즐거움이다.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누군가를 볼 때 느끼는 경외감 역시 이유가 된다.
김연경은 이 모든 이유를 다 충족한다. 이미 국가대표 은퇴를 예고했을 정도로 선수 기준으로 많은 나이에 치르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그는 모든 면에서 최고다. 짜릿하고 감동적이며 무시무시하다. 돌아보면, 시작부터 창대했다. 2005년 프로로 데뷔하자마자 무수한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국외로 진출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까지 제패하면서 각 리그 최우수선수상을 쓸어 담았다. 국제대회에서도 팀 전력상 메달은 못 땄어도 그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는 8경기 동안 혼자 207득점을 하는 진기록을 세우며, 메달권 밖 팀의 선수가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이변을 연출했다.
2005년 프로 데뷔 당시 많은 감독이 입 모아 예언했다. “김연경은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 배구를 대표할 선수가 될 거”라고. 죄송하지만, 그 예언은 틀렸다. 10년 채우고 5년이 더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우리 배구를 넘어 세계 배구의 중심에 서 있다.
김연경은 소탈하고 솔직하기 이를 데 없다.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고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경기 중에는 험한 욕도 서슴지 않고, 경기 밖에서는 자유롭게 팬들과 소통한다. 너무 친근한 ‘식빵 언니’라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10억명 중에 한명 나올 선수라고 국제배구연맹이 거듭 강조할 정도로, 그는 아득한 곳으로 날아오른 존재임을.
뭔가 단점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욕을 잘하는 것 같으니 인성에 대해 알아보자! 검색해보니 김연경은 2009년부터 형편이 어려운 배구 꿈나무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총 20명이 혜택을 받았는데, 그중에 이번 대표팀에서 함께 뛰는 선수들이 있다. 역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클러치 박’이라는 별명을 얻은 박정아와 2000년대생 정지윤이다. 후원자와 장학생이 한 팀에서 뛰고 있다니!
이런 뉴스도 보인다. 8강전에서 우리 팀에 진 터키 선수들이 유난히 슬피 울었는데, 산불 피해가 막심한 조국을 승리로 위로해주려던 바람이 좌절되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연경의 팬들이 그의 이름과 ‘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터키에 묘목 기부 캠페인을 벌였고, 터키인들이 이번에는 슬픔이 아니라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단다. 이른바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인가? 그의 인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는… 그만 알아보자.
김연경을 경배하며 라디오에서 틀었던 ‘헐’의 가사처럼,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배구의 신이 있다면 김연경은 신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이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