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조선을 대표하는 학문과 예술의 거장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지금까지 미술사학계와 미술인들이 대부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온 출생지는 충남 예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추사 유산 답사의 시발지로 지목되곤 하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영조의 사위로 월성위로 추존된 증조부 김한신과 상속자 조부 김이주의 고택이다. 학자들은 이른바 ‘월궁’이라고 일컬어온 곳이다.
서울 경복궁 서쪽 통의동이 출생지라는 설도 미약하지만 존재한다. 서울 종로구청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종로구청 쪽은 1994년 6월 간행한 <종로구지>의 ‘통의동’ 항목에서 일부 후손들의 증언을 근거로 통의동 우체국 일대인 통의동 7번지를 추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표기했고, 그해 12월 간행한 <종로의 명소>라는 책자에는 통의동 35-5번지 옛 백송동 부근을 김정희 선생이 나신 곳으로 지목했다. 통의파출소 뒤편 금융감독원 연수원 자리다. 앞서 서울시 쪽도 1987년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던 서울 통의동 35-15번지에 ‘김정희 선생 집터’라는 표석을 세운 바 있어, 현재 서울에만 김정희 생가로 지목되는 곳이 세군데다.
추사 김정희의 한양 낙동 출생 사실을 기록한 외가 친척 유만주의 일기 <흠영>. 그의 일기는 2016~17년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으로 대중에 선보이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데 앞으로 추사의 출생지는 예산이나 통의동에서 서울 명동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중견 미술사연구자 최열(65)씨가 최근 출간한 신간 <추사 김정희 평전>(돌베개 펴냄)을 통해 추사의 고향이 서울임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 자료를 새삼 들고나온 것이다. 최씨는 신간 서두에서 1786년 6월3일 오늘날의 명동 부근인 한양성 내 남쪽 낙동에서 추사가 태어났다는, 외가 친척 유만주의 일기를 소개하면서 출생지 및 고향 논란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고 단정했다.
유만주(1755~1788)는 낙동에 살았던 추사의 외할아버지 유준주(1746~1793)의 사촌동생이다.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살았던 유만주는 죽기 한해 전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흠영>이란 제목을 붙인 일기를 썼다. 최씨는 2015년 편역본이 나온 <흠영>의 번역본 일부를 인용해 추사가 태어난 다음 날 기록을 제시했다. 1786년 6월4일치 일기에 ‘그날 아침에 준주 형의 딸(추사의 모친)이 전날 밤 10시에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의 집에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했’으며, 같은달 25일치 일기에는 ‘형의 집에 가서 형의 딸이 낳은 갓난아기를 보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최씨는 “일기는 호적보다 정확한 자기 기록인 만큼 추사의 출생지가 서울임은 일기 내용을 보아 확실하다. 논란은 끝났다”고 단정했다.
낙동은 오늘날 ‘마징가 빌딩’으로 유명한 서울 중앙우체국 빌딩 뒤편의 명동 일대로 현재 중국대사관 부근이다. 추사는 여기 외가에서 태어난 뒤 양자로 들어간 큰아버지 월성위 김노경의 집이 있던 통의동 일대에서 성장했다고 최씨는 밝혔다.
지금까지 현전하는 추사의 생전 편지나 사후에 나온 문집과 사서기록에는 그의 출생지가 구체적으로 나온 것들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산 고향설을 처음 뿌리내리게 한 것은 근대기 추사학의 선구자가 된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 후지츠카는 1936년 자신의 박사논문 ‘이조의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에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산 월궁에서 고고지성을 울렸다’고 써서 추사가 출생한 장소를 예산으로 지목했으나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고 최씨는 지적했다.
이후 김약슬, 최완수, 허영환, 유홍준 등 미술사 연구자들은 저술에서 한결같이 후지츠카의 견해를 받아들여 기술해왔다. 1969년 저술 <완당바람>으로 유명해진 미술사학자 이동주만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추사의 고향을 저술에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근대미술사를 주로 연구하면서 이중섭과 박수근 등의 평전과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 등을 쓴 최씨는 추사 예술세계 탐구를 55살 때부터 시작해 10년간에 걸친 평전 집필을 통해 풀어냈다. ‘예술과 학문을 넘나든 천재’란 부제가 붙은 책의 1000쪽 넘는 분량에 1장 탄생부터 12장 영원까지 모두 12장으로 갈라 추사의 생애와 발자취를 정리했다.
추사의 <난맹첩>에 수록된 난초화. 간송미술관 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추사 김정희 평전>은 그의 고향을 둘러싼 논란을 서울로 확실하게 정리한 것 이외에도 학계의 숨은 의문거리였던 추사의 스승, 제자 수 등에 대해서도 100여년간 학계의 담론을 총망라하면서 허구와 과장, 왜곡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특히 이런 과정을 주도한 핵심 인사가 추사학의 선구자인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와 간송미술관의 연구자 최완수라는 게 책의 논지여서 여러모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추사의 스승에 얽힌 논란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고증과 견해를 내놓고 있다. 흔히 그의 스승으로 그가 1809~10년 청나라 사신단 일행으로 사행을 갔을 때 베이징에서 만난 청나라 대문인 옹방강과 완원을 언급하는데, 이는 과장된 것이며 사제관계라는 말을 처음 들고나온 이는 후지츠카 치카시이고 여기에 살을 붙인 이가 최완수 간송미술관 민족미술연구소장이라고 최씨는 썼다.
아울러 실학자인 초정 박제가가 청년 시절의 추사를 지도했다는 스승설도 아무런 구체적 근거가 없다고 본다.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 친우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제가 같은 이도 도처에 착오를 범해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개탄하고…’ 등의 문구를 써가며 그를 강경하게 비난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초정 박제가 스승설은 “터무니 없는 헛소리에 가깝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추사가 성장한 배경으로 주목하는 것은 17살 연상이었던 대문인 자하 신위(1769~1845)의 문하다. 시서화에 모두 밝았던 자하 신위는 19세기 초 조선 문예계를 이끄는 최고의 영수였는데, 추사는 1806년 이전부터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의 학문과 예술, 인맥을 흡수했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 평전>은 추사의 사후 1세기 만에 제자 수가 열배 가까이 불어난 기현상도 이야기한다. 생전에 제자는 소치 허련과 추금 강위 2명뿐이었으나, 그의 사후 최완수 등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설정된 제자 수가 20명 가까이 늘면서 신화화됐는데, 추가된 제자들을 능력 미달자로 폄하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지적을 내놓는다. 심지어 추사가 생전 극진한 존경을 표했던 신위마저도 추사의 드넓은 역량에 미치지 못하는 미달자로 폄훼하는 왜곡이 되풀이됐다고 했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 책이 ‘팩트 찾기’를 통해 겨냥한 것은 간송학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추사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후지츠카 치카시와 그의 업적을 이어 추사의 재조명을 본격화한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과 그의 수하 제자들을 이르는 간송학파의 추사 담론의 상당 부분이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으로 통박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는 이에 대해 “어떤 구절에서도 직설적인 비판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동안 찾은 추사 관련 담론에 얽힌 문헌과 기록의 팩트들을 쌓아놓고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기록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