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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늘 생각하는 마지막 테마가 있어요, 하나로 떨어지는 그것!”

등록 2021-08-14 17:38수정 2021-08-14 20:42

[한겨레S] 이충걸의 인터+뷰
패션디자이너 진태옥

한국 1세대 ‘현역’ 패션디자이너로 1989년부터 유럽 진출 ‘명성’
딸을 영웅으로 키우려 한 어머니 있었지만 가부장 속 어려움 겪어
업사이클링·패스트패션 문제 관심 “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내가 1989년부터 불모지 파리에 가서 한국 깃발을 들었을 때, 다들 한국이 어디 있나? 그랬어요. 그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어요. 너는 누구야? 그 찰나, 나는 백자라고 말했어요. 나는 달항아리야, 백자야.”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내가 1989년부터 불모지 파리에 가서 한국 깃발을 들었을 때, 다들 한국이 어디 있나? 그랬어요. 그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어요. 너는 누구야? 그 찰나, 나는 백자라고 말했어요. 나는 달항아리야, 백자야.”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여름의 오후 세시. 청담동 진태옥 부티크 3층, 전면이 유리인 창은 실내 곳곳에 햇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그는 작은 정원을 배경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오버사이즈 화이트 셔츠에 검정 와이드 팬츠, 특징적인 무심함으로 분리와 결합의 공식을 보여주는 제복은 진태옥의 두번째 피부였다.

옷을 만든 지 세어서 57년. 한국 패션의 보통명사가 된 디자이너는 그날도 아침 열시에 출근을 했다. 사계절 내내 벌어지는 일이었다.

“차 한잔 딱 마시고 테이블에 가서 종일 디자인해요. 광목이든 버리는 걸레든, 집었다 하면 무심코 디자인하는 거예요. 좋든 나쁘든 소재가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게 나의 원천이에요.”

사무실은 약품 처리를 한 것 같은 강박적인 냄새 대신 무 같은 담백함을 풍겼다. 그의 성격 같은 조붓한 공간에는 비밀을 숨길 칸막이도 없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놓을 게 아무것도 없어.”

예전에 <일본 지큐> 크리에이티브 에디터는 미니멀리즘을 좋아한다면 ‘세루티’를, 여성적인 라인을 원한다면 ‘엠마누엘(에마뉘엘) 웅가로’를 보라고 했다. 진태옥의 정수로서 미니멀리즘과 그 위에 곁들인 여성성의 우아함을 보았다면 애초에 꺼내지도 못할 소리였다.

일 중심으로 삶을 맞추지 않고 삶 위주로 일을 조정해온 세월. 패션 비즈니스는 확실히 퍼즐과 독단, 모호함과 확실함의 경쟁 같다. 그러나 함께 있는 내내 모호함은 한숨, 확실함은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부터 디자인까지, 에이(A)부터 제트(Z)까지 오로지 내가 다 커버해요. 피팅도 내가 해요. 거울 앞에 서서 디자인을 내 몸에 맞춰요. 그래서 열심히 운동하는 거예요. 배 나오면 안 되니까. 매일 운동한다고 하는데도 헬스장이랑은 달라요. 수영을 못 하니까. 전에는 한번에 1000미터를 수영했어요. 여든 중반 넘어서는 500미터. 수경 쓰고 물에 들어가서 발로 탁 차고 나가면 너무너무 평화로워요.”

글렌 클로스를 닮은 영화적인 무드, 상대의 눈을 직시하며 말하는 정직, 염색으로 감추지 않은 모랫빛 머리카락, 나이키의 창처럼 귀밑으로 휘어들어 오는 단발머리, 그리고 코코넛색 주근깨가 만드는 톰보이 얼굴.

장식이 없는 흰색 운동화는 두부처럼 담담해 보였다. 동대문시장에 원단 보러 갔다가 노점에서 만원 주고 산 운동화는 윈도에 디스플레이까지 했다. “이게 진짜 아름다움이에요. 이걸 몇켤레 사서 계속 신는 거예요.”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장식이 없는 흰색 운동화는 두부처럼 담담해 보였다. 동대문시장에 원단 보러 갔다가 노점에서 만원 주고 산 운동화는 윈도에 디스플레이까지 했다. “이게 진짜 아름다움이에요. 이걸 몇켤레 사서 계속 신는 거예요.”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나는 달항아리야, 백자야

패션에 몸담은 이들에게 진태옥은 하나의 단체와 같다. 앙드레 김과 함께 한국 1세대 패션디자이너, 오래된 것과 요즘 것의 코드를 전복하는 한국식 미니멀, 펑키한 도발과 해학적인 실험. ‘최초’는 그의 경험을 약칭한다. 파리의 골문을 뚫고 고급 기성복 쇼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하고, 파리 같은 주요 도시에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개념 자체가 유토피아적인 꿈일 때, 버그도프굿맨 백화점과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매장을 열고, 예술 서적을 지배하는 영국 파이던 출판사 선정 ‘20세기 패션인 500인’에 명단을 올리고, 서울올림픽 유니폼을 디자인하고, 서울패션디자이너협회(SFA)의 시작이 되고…. 공식적인 성공부터 비공식적인 성공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자신을 입증해왔다. 유럽 내 브랜드 입지와 손실 사이에 간격이 벌어진 ‘아이엠에프’(IMF) 때조차.

“내가 1989년부터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 파리에 가서 한국 깃발을 들었을 때, 다들 한국이 어디 있나? 그랬어요. 그런데 첫번째 쇼를 했는데 바이어들 순위에 내가 54위, 겐조가 59위. 파리도 별거 아니네? 그때, 거기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어요. 진태옥, 너는 누구야? 그 찰나, 나는 백자라고 말했어요. 나는 달항아리야, 백자야.”

그렇게 유럽 시장에 파고들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5000원이면 살 수 있는 면 소재 탱크톱을 150달러에 팔았어요. 지금으로 치면 한 100만원? 배짱 좋게 150달러 붙여놓고 아, 마케팅이란 이런 거구나, 그때 알았어요.”

그의 참된 가치는 지금까지 두드러지는 현역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색은 윤택해지고 감각은 불이 붙는다. 그는 요즘 관심사가 소년들이 춤과 노래로 필생의 에너지를 쥐어짜는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 <라우드>(LOUD)와 <슈퍼밴드2>라고 말했다.

“걔들이 거기에 미쳐 있잖아요. 그 긴장감이 전자파가 움직이는 것처럼 도전을 줘요. 내가 쟤들같이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했나? 매스컴이 진태옥을 만들어준 거 아닐까? 엉터리인 나를? 그 무대는 인생하고 똑같아요. 뽑혀야 되는 거잖아요. 티에리 에르메스가 그랬어요. ‘잘하는 것보다 더 위에 있어야 된다. 최고로 잘하는 것에 머무르면 안 된다.’”

인생은 토너먼트. 마운드에 나올 때마다 피드백이 주어진다. 그는 최후가 아니라 최고를 얘기하면서 반 토막 난 구식 방식과 철 지난 유행을 타고 넘었다. 그리고 옷의 건축으로 따분한 도시에 형태를 부여했다.

“난 비티에스(BTS)나 블랙핑크한테도 관심이 많아요. 그들로 인해 지구의 젊은 애들이 다 한국어를 배우니까. 패션도 서울이 성지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얼마 전 서울시에 가서 막 열변을 토했어요. 패션도 스타 디자이너가 나와야 세계적이 된다, 홍보 아니면 안 된다, 그러자면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예전에는 네댓시간 울면서 얘길 해도 반응이 없었는데, 지금 정책을 맡은 분은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으려고 30년 세월이 걸린 거예요.”

그는 이를테면 재고 의류를 새 아이템으로 재생하는 업사이클링이며, 제3세계에 버려지는 패스트패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았다. 사적인 감각을 공적인 생활로 바꾸고, 지구를 공공복지라는 구상으로 바라보면서.

가부장 풍속 따라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그는 193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났다. 그 시기는 인구통계학의 어디쯤 속할까. 사회적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지에 따라 삶이 결정되던 시절, 그는 스스로 추진체가 되었다.

“어머니는 가을에 명주 두루마기 안을 비취색으로 받쳐 입으셨어요. 파마 안 한 머리에 쪽을 쪄서 은비녀 딱 꽂으시고, 하얀 고무신에 명주 머플러를 한번 접어서 다니셨어요.”

어머니의 특권 같은 재능은 그의 미래가 되어 현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그리운 손가락으로 셔츠 소매를 자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는 원산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에서 공부하셨는데 나를 영웅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딸이 하나고 학교 전체 회장이고 똑똑하다 그러니까 완전히 나를 숭배하셨어요.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 시집살이가 너무 심했어요. 남편은 전통적인 가정의 장남인데 나는 존재감도 없이 세끼 밥해야 하고 빨래해야 하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그래서 합법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어요. 내가 학교 다닐 때 모양을 좀 냈거든. 아, 내가 좋아하는 옷을 만들자. 그래서 아이 돌 지나서 패션을 배웠어요.”

그때가 스물여덟살. 가부장 풍속을 따라 꿈을 날려버릴 수 없었다.

“선생님이 스커트 하나 잘하면 디자인 잘할 수 있다고 했어요. 아이템이 아니라 정신을 얘기한 건데, 그때는 이해를 못 했어요. 나는 디자이너들 우리 회사 입사 테스트할 때 다른 거 안 시켜요. 누구는 스커트, 누구는 셔츠, 누구는 원피스. 기본 라인만 해라. 60년을 돌아보니까 기본 하나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어요.”

키위 껍질처럼 까슬까슬하면서 새침한 목소리. 헬무트 랭(랑)의 검정 부츠가 지적인 갱스터를 만들듯 진태옥의 화이트 셔츠는 그 자체로 패션 기호가 되었다. 남자들이 턱시도를 입듯이 여자들의 환한 배경이 되었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백만개의 색채를 뿜어내면서.

“난 사실 컬러를 보면 막 흥분해요. 그런데 자꾸 절제를 하다 보니까 내가 걸어온 길의 종착역이 블랙 앤 화이트가 된 거지. 때로 형광색 같은 겨자 색깔로 나한테 뭘 하나 만들어줘요. 쇼킹 핑크색을 베이지색 바지하고 입으면 기분이 그냥 좋아요. 내 안에 색깔 욕심을 다 덜어내고 나니까 이제는 모든 것에 자유로워요. 그런데 요전에 강화도에 갔을 때 갯벌의 짙은 회색이랑 브라운이 섞인 색을 보고 어머나, 이런 색이 지구에 있어? 저 색으로 아무 디자인 없이 뭔가 만들면 얼마나 멋있을까….”

창업자가 건재한 브랜드에서 새것을 도모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쌍방향의 의사 결정이 막힐 수 있어서. 그런데 참고할 텍스트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된 지금이라면 알고리즘 따라 패션의 매트릭스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 시대는 잡지 아니면 세계 패션의 흐름을 몰랐죠. 이제 완전히 패러다임이 바뀌었어요. 전에는 디자인을 혼자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아니에요. 패션에 예술이라는 단어를 심기 위해서는 잡지처럼 영상도 그래픽도 다 필요해요. 젠틀몬스터(라는 패션 아이웨어 브랜드) 친구들이 잘하죠. 나는 이 시대에 나의 결대로 가려고 해요. 다름은 존재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방향을 정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지 모르는 모델이 형태도 모르는 새카만 옷 한벌 입고 나왔는데 정신적 미학적 공간적으로 최고의 미니멀리즘, 하나로 떨어지는 그것. 사람들이 저게 바로 진태옥이다, 그거면 끝이에요. 결국 그 자리에 온 사람들과 나의 얘기가 되는 거니까요.”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누군지 모르는 모델이 형태도 모르는 새카만 옷 한벌 입고 나왔는데 정신적 미학적 공간적으로 최고의 미니멀리즘, 하나로 떨어지는 그것. 사람들이 저게 바로 진태옥이다, 그거면 끝이에요. 결국 그 자리에 온 사람들과 나의 얘기가 되는 거니까요.”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여자한테 여권도 안 주던 시절 유럽으로

그의 옷은 대를 물린다. 여성복의 만국기 같은 알록달록함이나 부유층 여성들의 노골적 과시 취미는 그의 의도와 다르니까.

“1965년 이화여대 앞에 낸 가게는 요만했어요. 가운데에 동그란 등 하나 달고 공간의 느낌을 파생시켰어요. 벽을 울퉁불퉁하게 하려고 목수 한명 불러서 목장갑으로 시멘트를 전부 버무렸어요. 또 벽에 옷감 넣는 사각 장을 짜 나무를 사선으로 대고, 돈이 넉넉지 않으니까 원단 일곱개를 사서 감았어요. 부피 있게 보여야 하니까. 2월7일 날 오픈했는데 주문이 그날로 끝났어요. 공간은 아주 중요해요. 누가 그 공간에서, 그 공감각 속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입는다는 것은 왜 중요한가? 추위를 막기 위해서? 벗는 즐거움을 알기 위해서? 그는 옷 입기에 대해 단 한번 전문적인 충고를 해주었다.

“디자이너는 제시만 해요. 입는 사람이 마침표를 찍는 거예요. 옷을 입으면 자기 모습이 그것으로부터 나와야 해요. 그 옷이 내가 된 것처럼. 사실 하찮은 것으로 즐기는 게 최고 사치예요. 내가 대마로 만든 셔츠를 다려서 아침에 입을 때 다 끝나는 거죠. 그 당시 그 손님들은 아직도 오세요. 나이 들어 거의 일흔 중반 됐는데 손주까지 데리고 와요.”

그 후 명동에 낸 ‘프랑소와즈’ 매장은, 1900년대 초 런던 해러즈 백화점 세일 때 입이 떡 벌어지는 부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와르르 달려간 이야기 못지않은 폭발력이 있었다.

“나는요, 감각이 너무 좋은 손님들이 내 옷을 입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 어쩌면 내 옷을 저렇게 잘 표현해주실까. 얼마 전에 30년 만에 도진 이석증 때문에 서울대학병원에서 번호표를 받는데, 민화가 프린트된 튜닉 블라우스가 지나가는 거예요. 파리에 있을 때 한국 민화를 프린트했거든요. 막 뛰어가서 이 옷 디자인한 사람이라 그러니까, 이거 산 지 오래됐는데요 그래서, 아마 30년 됐을 거예요 그랬더니, 맞아요, 맞아요…. 나는 이렇게 오래 입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번이나 절을 했어요. 에피소드 또 있어요. 1970년도엔 한국에서 여자한테 여권을 안 내줬어요. 그때 외무부 아는 분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받았는데, 3개월밖에 안 줘요. 그 3개월을 죽어라 돌아다니는 거예요. 1971년 2월이었나, 내가 묵은 그랜드 호텔과 왕궁 사이로 빙산이 둥둥둥둥 떠내려오는데 너무 신비스러웠어요. 사람이 참 묘하죠. 아주 못된 거지. 한국 여자는 아무도 못 나오는데 나만 왔다는 게. 그때 뮤지엄에서 어떤 동양 여자가 내가 얇은 모직으로 만든 검정 트렌치코트를 입고 르네상스 명화 <핑크 레이디>하고 <블루 보이>를 보고 있는데, 눈물 날 정도로 반가웠어요. 그 사람도 놀라지. 무슨 이북 사람인가 하고. 스웨덴에는 음악 공부 하러 왔대요. 자기가 만든 옷은 자식 같아서 여러 사람 있는 데서도 찾아요. 그게 너무 신기해.”

유행병 시절이 연장될수록 다층적인 세상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왕성한 트렌드로 예쁜 것들을 이야기하던 세월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다. 그는 이때 온라인 브랜드 제이티오(JTO)를 만들어 검색 엔진이 만든 무한대의 유통망을 누빈다.

“나 같은 사람이 온라인 비즈니스 한다는 것이 참 난센스지.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잖아요. 그 안의 세계가 오프라인보다 더 복잡하더라고. 두 시즌은 어떻게 정조준할지 탐색했어요. 제일 많이 팔리는 건 티셔츠, 그다음에 집업 후드티. 요번 에프더블유(F/W)에 본격 가동을 할 생각이에요.”

외로움을 사랑하는 미니멀리스트

전에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늙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든여섯살. 속도를 줄일 줄 모르는 사람은 물양귀비가 핀 돌확을 바라보았다.

“매일 참새 세마리가 와서 수조에서 목욕을 하는데, 다른 큰 놈이 어디서 날아오면 엄마가 중간에 딱 서서 못 오게 하는 거예요. 엄마가 먹을 걸 가지러 갔다 오면 얘들도 같이 뛰어서 나뭇가지에 앉고 조잘대는 거예요. 저 잎 하나가 나온 바위는 독도인데, 내가 지었어요. 이끼에도 얼마나 물을 열심히 주는지 몰라요. 나는 이렇게 혼자 스토리를 만들면서 순간순간 살아요. 뭐든 스토리를 만들어서라도 일부러라도 행복해야 한다….”

그는 쫑긋한 입술로 행복을 심호흡했다.

“그러나 후회하는 일도 많아요. 연애 못 해본 것도 후회, 결혼한 것도 후회. 그러나 수조에 비가 떨어지는 아침에 붕어 밥을 주면 입을 딱 벌리고 쫓아와요. 간밤에 잘 잤어? 붕어하고 얘기하니까 사랑이지. 참새하고 얘기하니까 사랑이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은, 이젠 운명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오겠어요?”

사랑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젊음은 바닥이 안 보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요. 나는 사랑을 해본 것 같지 않아. 나는 외동딸로 자라서 그런지 그렇게 목숨 걸고 사랑한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불행해요. 나는 텔레비전 보면 왜 노부부가 손잡고 가는 거, 그게 그렇게 부러워요. 외롭죠. 눈물이 나도록 외롭죠.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무슨 형용사가 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 외로움을 사랑해요. 지극히 사랑해요…. 내가 별 이상한 것까지 얘기 다 하네.”

할 말이 없다던 사람은 쌓아둔 이야기가 많았다. 패션 도시의 셰에라자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바람이 수령 30년 된 느티나무 가지를 흔들어댔다. 저편으로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새가 소쇄해 보일 때 어쩐지 여름이 지나간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장난을 걸듯 발을 살짝 들었다. 장식이 없는 흰색 운동화는 두부처럼 담담해 보였다. 동대문시장에 원단 보러 갔다가 노점에서 만원 주고 산 운동화는 윈도에 디스플레이까지 했다.

“이게 진짜 아름다움이에요. 이걸 몇켤레 사서 계속 신는 거예요.”

머랭처럼 가벼워 보이는 신발을 신으면 내딛는 바닥이 평평하게 느껴질까?

“난 형편없는 사람이에요. 패션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식하고 무지하고 대충 살아요. 근데 해마다 내 생일에 후배들이 꽃을 보내요. 그런 벗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나는 이 여생이 너무 행복해요. 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없어요. 이 우주를 다 내가 가진 것 같아요.”

그렇게 천진한 사람에게 ‘남은 인생’이 어디 있나? ‘넘치는 인생’이라면 몰라도.

“디자인하다가는 안 죽을 것 같아요, 행복해서.”

그가 서둘러 박물관에 안치될 일은 없을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재능. 매 순간 지복(至福)에 가닿는 사람은 인터뷰를 개별적인 순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질문 하나가 남았다. 당신의 마지막 쇼는 무엇이 될까요?

“그게 늘 생각하는 마지막 테마예요. 그냥, 누군지 모르는 모델이 형태도 모르는 새카만 옷 한벌 입고 나왔는데 정신적 미학적 공간적으로 최고의 미니멀리즘, 하나로 떨어지는 그것. 사람들이 저게 바로 진태옥이다, 그거면 끝이에요. 결국 그 자리에 온 사람들과 나의 얘기가 되는 거니까요.”

어느 한획 눈을 방해하는 것 없이 순전한 옷 한점. 모든 걸 하얗게 무음으로 덮어버린 뒤의 가차 없는 비움. 그것이 진태옥을 위한 마지막 쇼의 이름인 것이다.

글 이충걸 작가(전 <지큐코리아> 편집장), 녹취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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