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와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럼 저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배우 황정민의 2005년 청룡영화상 수상 소감이다. 이후 그는 영화 <국제시장>과 <베테랑>으로 ‘쌍천만 배우’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 대배우 황정민이 납치됐다. 영화 제작 보고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서다. 뭐지? 이거 진짜야 가짜야?
18일 개봉하는 영화 <인질>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은 배우 황정민. 이를 연기하는 배우도 황정민이다. 끌려간 곳엔 또 다른 인질이 있다. 납치범이 둘 다 풀어주는 조건으로 요구한 몸값은 5억원. 15시간 안에 주지 않으면 둘 다 목숨을 잃을 처지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필감성 감독은 실제 사건을 다룬 외국 다큐를 보고 영화를 구상했다. 2004년 중국 배우 우뤄푸(오약보)가 납치된 사건이다. 이는 류더화(유덕화) 주연 영화 <세이빙 미스터 우>로 만들어져 2016년 국내 개봉도 했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인공의 활약상이다. <세이빙…> 주인공은 다소 무기력한 모습이지만, <인질>의 황정민은 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손발이 묶인 황정민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까지 하는 연기력을 발휘해 납치범들을 속이고 틈을 노린다. “영화 초중반 내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상반신만으로 감정의 스펙트럼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 1순위가 황정민이었다”는 필 감독의 기대를 200% 충족한다. 출연작 <신세계>의 명대사 “드루와 드루와”와 “브라더”를 적절히 활용하며 웃음도 자아낸다.
본인이 본인을 연기하는 상황을 두고 황정민은 언론시사회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작품의 연기보다 더 어려웠다”고 했다. “내가 납치당해본 적이 없잖아요. 차라리 가상의 인물이면 맘대로 감정을 조율해 만들 텐데, 여기선 내가 실제 황정민이니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 더 어려웠어요.”
고민을 덜어준 건 다른 배우들과의 시너지다. 현실감을 높이고자 황정민을 제외한 주요 배우들을 낯선 얼굴로 채웠는데, 1000 대 1 경쟁률을 뚫고 합류한 이들의 존재감이 강렬하다. 특히 납치범 우두머리 최기완을 연기한 18년차 뮤지컬 배우 김재범이 눈에 띈다. 2인자 염동훈 역의 류경수, 황정민의 오랜 팬을 자처하는 조직원 용태 역의 정재원, 조직의 브레인 구실을 하는 샛별 역의 이호정 등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황정민은 이들을 발탁하는 오디션부터 관여했고, 촬영 한달 전부터 공간을 마련해 이들과 리허설을 했다. 그는 “영화는 주인공만 잘해선 안 된다. 인질과 납치범이 한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며 뿜어내는 에너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 덕에 영화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과 에너지를 분출한다.
후반부 들어 액션 장면도 나오는데, 이 또한 실제에 가깝게 보인다. 끊지 않고 원테이크로 촬영한 산속 추격 장면은 긴박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하고, “티브이 프로그램 <맨 인 블랙박스>의 실제 영상처럼 찍었다”는 자동차 추격 장면은 필 감독 말마따나 “옆 동네에서 실제 교통사고를 목격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막판 결투 장면은 화려한 액션과 거리가 멀다. 황정민과 납치범의 몸싸움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개싸움’에 가깝다. 황정민은 “액션처럼 보이지 않고 겁에 질린 한 사람의 살고 싶다는 몸부림으로 보였으면 했다”고 말했다. 필 감독은 “몸으로 부딪히고 땀 냄새 나는 날것 그대로의 거친 액션, 보면서 ‘아프겠다’ 하는 실감 나는 액션을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필 감독은 20년 전 김성수 감독의 <무사> 연출부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류승완 감독과도 일했다. 2005년부터 장편 데뷔작을 준비하다 엎어지길 여러 차례 반복한 끝에 이번에 꿈을 이뤘다. <인질>은 류 감독의 아내 강혜정 대표의 제작사 외유내강이 제작했다. 외유내강은 지난달 28일 개봉한 류 감독의 신작 <모가디슈>도 덱스터스튜디오와 공동 제작했다. 필 감독은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앞장서서 개봉한 <모가디슈>의 배포를 존경한다. <인질>도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황정민도 “이런 시기여서 부담도 되지만, 보란 듯이 더 잘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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