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꾸며낸 국가권력 고발

등록 2021-08-20 18:26수정 2021-08-20 18:43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다큐인사이트 ‘스파이’ 편
<다큐인사이트> ‘스파이’ 편. 한국방송 제공
<다큐인사이트> ‘스파이’ 편. 한국방송 제공

지난 19일 광복절 특집기획으로 <다큐인사이트> ‘스파이’ 편이 <한국방송1>에서 방송되었다. 1970년대 한국 유학길에 오른 재일동포 중 중앙정보부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75년 11월22일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이 있다. 21명의 간첩이 검거되었는데, 그중 10여명이 재일동포였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조작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런 간첩 사건에 연루된 재일동포의 수가 100여명에 이른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고, 2015년에 재심 운동을 벌였다. 이들 중 30명 넘게 재심을 신청하여, 40년 만에 재심 법정에서 속속 무죄를 선고받았다. 40년간의 누명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사건과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이 있다. 김효순은 2015년에 <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출판하였는데,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던 언론인으로, 이번 다큐멘터리 ‘스파이’ 편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맡았다.

한국방송 제공
한국방송 제공

2015년 당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도 있다. 최승호 피디는 <뉴스타파>에서 <조국이 버린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자백>에서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을 다루면서 과거에 있었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을 다루었다. 이런 콘텐츠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낯설고 먼 이야기다. 책이나 다큐멘터리도 관심 있는 소수만 찾아볼 뿐이다. 2015년보다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훨씬 줄어들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 일어난 조작 사건에 대한 폭로는 박근혜 정권 당시에는 유효한 정치적 관심을 지닐 수 있었지만, 박근혜 정권 탄핵 이후에는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령 다큐멘터리 <자백>이 개봉할 당시 김기춘은 여전히 ‘빌런’일 수 있지만, 지금 그는 잊힌 존재이다. 영화의 만듦새와 무관하게 <그때 그사람들>이 지녔던 파급력을 <남산의 부장들>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말하자면 지금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은 티브이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등에서 일종의 근현대사로 다룰 법한 이야기일 뿐, 8·15 특집 다큐멘터리로 다룰 이야기인지는 다소 애매한 면이 있다. 오히려 <채널 에이>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2000년대 일어났던 ‘흑금성’ 사건을 입체적으로 다루었던 것이 훨씬 흥미롭고 핫한 정치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광복절 특집으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다룬 것에 의미가 있다. 일단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국방송>이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삽입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 장면은 2015년에 만들어진 콘텐츠와 차별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동포 간담회에서 이들 피해자에게 국가를 대표해서 사죄하였다. 이로써 과거 청산이 한 조각이 맞추어진 셈이다.

프로그램의 또 다른 의미는 청산해야 할 과거에 대한 전선을 다르게 세팅하는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광복절을 맞아 일본제국 통치의 잔학상을 그리거나, 독립운동사를 조명하거나, 해방 이후에 일본에 남아있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그리는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에게 자행한 고문과 만행을 보여줬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일본 대 한국이라는 민족을 경계로 전선을 긋는 방식이 아니라, 일본이든 한국이든 잘못된 국가권력 대 인권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스파이’ 편에서 피해자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깨닫고, 한국을 더 잘 배우고 이후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서 기여하고자 청운의 꿈을 안고 한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참변을 당했다. 일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접하며 살았던 이들은 한국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며 거짓 진술을 하였다가 간첩 누명을 썼다. 이들의 고통은 가족들에게도 끔찍한 상처를 입혔다. 약혼자도 간첩 방조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을 살아야 했고, 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학업을 뒷바라지했던 가족들은 충격으로 몸져눕거나 한국 정부에게 협박을 당하거나 동포사회에서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간첩 주도로 일어난 사건으로 몰아갔다.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은 일본 시민사회였다.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일본 언론이 폭로하고, 일본의 변호사들이 알리바이 등을 문제 삼으며 변론에 나섰다.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구원회를 만들어 조력하였다.

한국방송 제공
한국방송 제공

남한의 반공 정권에게 짓밟힌 재일 한국인과 이들을 돕는 일본 시민사회의 구도는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졌던 민족을 경계로 한 가해와 피해 구도를 뒤흔든다. 이후로도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을 돌보지 않았고, 재심에서 잇달아 무죄 판결이 나와도 김기춘 등 당시 가해자들의 사죄와 반성은 뒤따르지 않는다. 이는 “역사 청산”의 목소리를 누구를 향해 쏟아내야 할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프로그램은 김효순이 당시 피해자들을 찾아가 증언을 듣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다소 밋밋한 만듦새에 아쉬움도 느껴진다. 당시 간첩 조작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으며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과는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지, 또 김대중 납치 사건과 문세광 사건 등을 포함하여 당시 재일동포사회의 정서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폭넓게 다루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1974년 가해자로서의 통렬한 반성을 담아 전범 기업 미쓰비시 본사에 폭탄을 터뜨렸던 일본 젊은이들과 그들을 돕는 일본 시민들을 조명했던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과 더불어, 협애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벗어나게 해주는 콘텐츠로 추천할 만하다.

대중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해뜰날’ 가수 송대관 별세 2.

‘해뜰날’ 가수 송대관 별세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3.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뉴진스 새 팀명은 ‘NJZ’…3월 ‘컴플렉스콘 홍콩’에서 신곡 발표 4.

뉴진스 새 팀명은 ‘NJZ’…3월 ‘컴플렉스콘 홍콩’에서 신곡 발표

경주 신라 왕궁 핵심은 ‘월성’ 아닌 ‘월지’에 있었다 5.

경주 신라 왕궁 핵심은 ‘월성’ 아닌 ‘월지’에 있었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