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책임…대한민국에 묻겠습니다

등록 2021-08-23 17:58수정 2021-08-23 18:24

29일까지 공연하는 창작 연극 ‘별들의 전쟁’
원고는 베트남 피해자 유족, 피고는 대한민국
한국 국가자격 상실 청구 소송…관객은 배심원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에 원고로 나온 응우옌티쭝 할머니의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에 원고로 나온 응우옌티쭝 할머니의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대한민국은 정상적인 국가를 지속할 자격이 없다는 판단하에 대한민국 국가자격 상실을 정식으로 청구합니다.”

21일 막을 올린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은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원고 쪽 변호사가 이렇게 청구하면서 시작한다. 한국군의 학살로 엄마와 오빠, 여동생을 잃은 응우옌티쭝 할머니가 원고, 대한민국이 피고다.

청구 이유와 내용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군인은 베트남에서 임신한 여성, 갓 태어난 어린아이 등 민간인을 학살했다. 하지만 진상규명부터 책임자 처벌까지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피고 대한민국의 유죄가 분명하다.’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lt;별들의 전쟁&gt;에서 취재기자의 증인신문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에서 취재기자의 증인신문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연극은 20여년 동안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취재해온 고경태 <한겨레> 기자가 쓴 책 <베트남 전쟁 1968년 2월 12일>과 2018년 서울에서 열린 모의법정인 ‘시민평화 법정’(주심 김영란 전 대법관)을 바탕으로 신세계 단원들의 자료 조사와 세미나를 통해 공동 창작됐다.

<별들의 전쟁>은 대한민국 군인이 베트남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진실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5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사건을 놓고도 각자의 신념과 국가주의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날을 기억하는 많은 증인이 법정에 선다. 파병 군인, 파병 군인 어머니, 간호 장교, 베트남전 국군포로, 라이따이한(한국인 병사와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기자, 현직 군인 등이 나와 직간접적으로 그날을 떠올린다. 하지만 기억은 충돌되고, 진실 찾기는 전쟁처럼 서로의 기억을 공격한다.

원고 자격으로 나온 할머니는 이렇게 얘기한다. “53년 전인 1968년 2월, 저는 12살이었어요. 한국군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우리 동네 사람들을 다 죽였어요. 저희 엄마랑 오빠, 여동생도 죽였는데, 왜 그랬는지…. 학살은 있었어요. 내가 그 증인이에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고 하니까, 대한민국에 그 책임을 물으러 왔어요.”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lt;별들의 전쟁&gt;에 원고로 나온 응우옌티쭝 할머니의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에 원고로 나온 응우옌티쭝 할머니의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참전 군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정찰 수색하는데 옆 동네에서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그 순간 앞에 가던 두 병사가 구덩이에 빠져 ‘악’ 소리도 못 내고 죽었어요. 중대장은 공격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그 동네에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학살이 아니라 베트콩을 상대로 전쟁을 한 겁니다. 참전 군인, 대한민국은 하나도 잘못이 없습니다.”

연극은 친절하면서 불친절하다. 베트남의 늪지대처럼 자료의 늪에 빠진 법정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쉽고 친절하게 보여준다. 무대 앞 대형 스크린에는 베트남 전쟁과 학살의 기록, 문서, 사진이 계속 나온다. 눈을 떼려야 뗄 수 없기에 지루할 틈이 없다.

연극의 말들은 거칠고 불친절하다. 증인들의 날이 선 말은 베트남전 비(B)―52 폭격기마냥 서로에게 융단폭격을 가한다. 풀포기까지 말라 죽게 하는 고엽제처럼 상대방 논리를 잘라버리는 거친 말을 내뱉는다. 이런 불친절한 말들에서 귀를 뗄 수 없기에 연극에 더 몰입하게 된다.

원고와 피고 변호인단 모두 무대 배경에 덩그러니 있던 나무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학살된 그곳에 서 있던 나무다. 원고와 피고 변호사 모두 나무한테 그 당시 진실이 뭐냐고 묻는다. 나무는 말하지 않는다. 나무는 ‘역사의 진실’을 상징한다. 나무는 하나의 진실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진실이 여러개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극 막판에선 대한민국을 대리한 변호사가 응우옌티쭝 할머니의 기억이 정확한지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재판을 건 이유가 ‘돈 때문이 아니냐’는 걸 암시하며 심문을 한다. 이에 응우옌티쭝 할머니는 답한다. 그 답은 영화 <식스 센스>처럼 소름 돋치는 반전으로 나타난다.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lt;별들의 전쟁&gt;에서 라이따이한의 증인신문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에서 라이따이한의 증인신문 리허설 장면. 극단 신세계 제공

이 연극을 보는 관객은 단순히 콘텐츠 소비자가 아니라 공연을 완성하는 한명의 창작자가 된다. 연극 마지막에 재판 평결을 내리는 배심원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유죄라고 판단하면 오른쪽 문으로, 무죄라고 판단하면 왼쪽 문으로 나간 뒤, 되돌아와서 판사의 선고를 듣는다. 21일 첫 공연에선 22 대 23, 1표 차이로 무죄 의견이 많았다. 22일 공연에서는 반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유죄든 무죄든 평결이 나오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모든 배우가 무대로 나와 춤을 춘다. 배우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과 다른 춤사위를 보여주는데, 흥이 나서 추는 춤이 아니다. 슬퍼 보이기도, 허망해 보이기도 한 그런 춤이다.

이 춤을 보면서 역사의 진실 앞에 당당해지기 위해선 이제라도 범정부 차원에서 진실규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진실을 제대로 규명했더라면, 광주에서 군인이, 민주화운동 당시 경찰이, 국민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극단 신세계 대표인 김수정 연출은 <한겨레>와 한 전화 통화에서 “<별들의 전쟁>에서 별은, 베트남과 미국,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 돌아가셔서 별이 된 사람 등을 뜻하는 중의적인 의미”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가해자라는 걸 인정하지는 않는다”며 “우리 사회가 이 점을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했다.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lt;별들의 전쟁&gt; 포스터. 극단 신세계 제공
극단 신세계의 창작극 <별들의 전쟁> 포스터. 극단 신세계 제공

오는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별들의 전쟁>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지원사업인 ‘젠더트러블 프로젝트’의 세번째 작품이다. 첫번째 작품은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놓고 벌어지는 광경을 담은 <생활풍경>, 두번째 작품은 로맨스·코미디·범죄물·사극·액션·좀비물·판타지를 넘나들면서 우리가 소비하며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 <사랑의 오로라>였다.

‘젠더트러블 프로젝트’는 남녀 젠더 문제를 장애·비장애, 피해자·가해자 등으로 확장해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역할로 살아가길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 그대로 개인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는 걸 제시하는 것이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공연장 근처에선 어떤 사람들이 ‘대한민국은 50여년 전 자유민주체제 수호와 세계평화를 위해 월남에서 용맹을 떨치며 베트콩 섬멸에 주력하였으나 단 한명의 양민도 학살하지 아니하였다’는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오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믿음’이 당신을 구원, 아니 파멸케 하리라 [.txt] 1.

‘믿음’이 당신을 구원, 아니 파멸케 하리라 [.txt]

[꽁트] 마지막 변신 2.

[꽁트] 마지막 변신

500억 들이고도 2%대 시청률…우주로 간 콘텐츠는 왜 잘 안될까 3.

500억 들이고도 2%대 시청률…우주로 간 콘텐츠는 왜 잘 안될까

‘인공초지능’ 목전, 지능의 진화 다시 보다 [.txt] 4.

‘인공초지능’ 목전, 지능의 진화 다시 보다 [.txt]

뉴진스 부모들 SNS 개설해 가짜뉴스 대응…“절박한 상황” 5.

뉴진스 부모들 SNS 개설해 가짜뉴스 대응…“절박한 상황”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