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스틸컷. 월트디즈니코리아 제공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첫 아시안 히어로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21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보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하 <샹치>)은 이날 기준 누적 관객수 154만2686명을 기록했다. 올해 외화 박스오피스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블랙 위도우>와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에 이어 세번째로 빠른 150만 관객 돌파다. 1일 개봉한 <샹치>는 암살자의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초인적 힘을 깨달은 영웅 ‘샹치’(시무 리우)가 암흑조직 ‘텐 링즈’의 수장인 아버지 ‘웬우’(량차오웨이)와 대결하는 액션영화로, 량차오웨이(양조위)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개봉 3주가 넘은데다, 새로운 기대작들이 대거 상륙한 추석 극장가에서도 <샹치>가 저력을 과시하고 있는 데에는, 마블영화 자체에 대한 강력한 팬덤과 함께 사랑에 눈이 먼 로맨틱한 빌런 웬우로 등장한 양조위에 대한 ‘역주행 신드롬’이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중경삼림>(1994)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특히 영화 개봉 이후 포털 카페 등을 중심으로 잊고 지내던 양조위의 소환에 감격스러워하는 중장년들의 멘션이 줄을 잇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양조위에 입덕(팬이 되었다는 뜻)했다’는 간증이 잇따르고 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양조위는 그렇게 나이 먹은 얼굴이 되는 데 60년이 걸렸지만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2시간이면 충분”(@jop******)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용자는 “양조위 이 웃긴 아저씨 눈빛 하나로 처연하고 애절하고 서사를 완성시켜버리네”(@imyo********)라고 했다. 한 이용자는 “드디어 내 딸과 양조위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다니”(@ISMK***********)라고 적어, 영화 <샹치>를 통해 양조위가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한 배우가 되었음을 보여줬다.
에스엔에스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양조위 소비’는 특정 세대에 국한된 게 아니다. 1980~9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양조위는 지금 중·장년층에게는 자신의 청춘이 투영된 아이콘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자녀 세대인 10~20대에게 양조위는 놀라운 ‘발견’이자, 부모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 됐다. ‘양조위 역주행’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영화 <색, 계>(2007)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2000년 <화양연화>로 제53회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배우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가 배우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가까웠다. 18살 때 친구인 저우싱츠(주성치)를 따라간 오디션에서 자신만 운 좋게 합격한 일화는 유명하다. 비애를 머금은 그의 눈빛과 내성적인 성격은 개인사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도박 중독자 아버지의 부재로 어릴 적부터 ‘설화적인 가난’을 겪었던 그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양조위를 인터뷰한 기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수줍음 많고 왜소한 체격의 사내로 기억한다.
영화 <화양연화>(2000)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1983년 메이옌팡(매염방)과 함께한 <청춘차관>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 등을 통해 한국 영화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의 외모는 다른 홍콩 배우들과 사뭇 달랐다. 홍콩누아르의 아이콘이었던 저우룬파(주윤발)와 같은 당당하고 남성적인 매력도, 장궈룽(장국영) 같은 꽃미남의 외모도, 류더화(유덕화) 같은 반항아 이미지도 그에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태롭고 쓸쓸한 눈빛이 있었다. 무엇보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분신)로서 그가 <화양연화>에서 보여준 절제된 연기는, 그의 애잔한 눈빛과 어우려져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함과 처연함을 되레 또렷하게 드러냈다. <화양연화>가 기존의 로맨스영화와 다른 지점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양조위 때문이었다.
영화 <무간도>(2003)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아울러 각성한 자가 거악과 대결한다는 다소 전형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샹치>가 남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도 다면적인 연기 덕분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샹치가 웬우에게 “우린 아버지가 필요해요”라고 말할 때, 흔들리던 그의 눈빛은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2007)에서 냉혈한이지만 가슴 속에 슬픔을 지니고 있던 미스터 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사실 그의 눈빛에 매료된 ‘시네필’들의 헌사는 이미 차고 넘친다.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다른 꿈을 꾸지만,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들의 질곡과 회한을 담는 양조위의 연기는 눈빛 하나부터 절절하다”(황혜림)거나, “장궈룽의 연인으로 등장했던 왕자웨이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물론 <영웅> <화양연화> <무간도> <2046>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에게 슬픔을 전염시키는 그의 깊고 애잔한 눈빛과 조용한 말투, 쓸쓸한 표정은 그가 출연하는 모든 영화들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조옥경)라는 평가들은, 결국 <샹치>에서 ‘양조위가 양조위했네’라는 세평(世評)을 인정하게 만든다.
영화 <해피 투게더>(1998)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촬영 기간 내내 자신이 맡은 역할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촬영 이후에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일이 어렵다는 그는,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웬우를 악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대본을 보니 나쁜 면모를 찾을 수 없었다. 악역을 다른 각도로 나타내야 해서 도전적이고 어려웠다”고 했다. 이제 할리우드마저 사로잡을 그의 눈빛을 기대할 시간이다.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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