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코오피와 최면약> 공연 중 텅빈 극장에서 관객이 홀로 브이아르(VR) 장비를 쓰고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연극 <코오피와 최면약>은 그 이름처럼 분열적이다. 잠을 깨기 위해 마시는 커피와 잠을 자기 위해 먹어야 했던, 이상의 <날개> 주인공처럼 말이다.
<코오피와 최면약>은 배우·관객·희곡이라는 연극의 3요소를 해체한다. 보통 배우는 연극무대에서 희곡으로 관객을 만난다. 하지만 이 연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무대가 없고, 배우와 관객이 직접 만나지도 않는다. 연극을 보는 게 아니라 연극에 참여하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관객은 스스로 분열하고 해체하는 경험을 느껴 볼 수 있다. <코오피와 최면약>의 매력이다. 여기에 외로움을 더한다.
<코오피와 최면약> 공연이 시작되는 서울역7017 안내소. 국립극단 제공
30일 저녁 7시30분. 남대문시장 근처에 있는 서울로7017 안내소. 이곳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공연장은 여기서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까지 이어지는 약 1㎞의 길이다.
안내소에서 문진표를 작성하고 체온을 측정한 뒤 휴대전화로 오디오에 접속해 안내소 밖을 나섰다.
이어폰을 꽂자,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작가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주인공 ‘나’의 독백이었다. 2021년 서울로를 걷는 ‘나’와 1930년대 명동에서 경성역(현 서울역)을 정처 없이 걸었던 소설 주인공 ‘나’가 스쳐 지나갔다.
이어폰으로는 <삼차각설계도>, <1933, 6, 1>, <오감도>, <권태> 등 이상이 쓴 소설과 시가 계속 흘러나왔다. 1930년대 시대 상황을 느끼도록 당시에 일어난 세계적인 주요 사건에 대한 설명도 들렸다.
서울로 시작점인 회현동엔 <날개> 배경인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소설 주인공 ‘나’가 코오피(커피)를 마시러 들렀던 ‘티룸’(다방)이 있던 서울역(옛 경성역)이 나온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시각과 청각이 분열됐다. 귀에서는 1930년대 이상 작품이 들렸다. 눈에는 2021년 서울역 풍경이 보였다. 귀와 눈이 마치 따로 노는 듯했다.
나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가끔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이 길을 걸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분열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내 뜻대로 노래를 들으면서 길을 걸을 때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내 뜻대로 못하거나, 의지대로 살지 못할 때 자아는 분열했다. 그 간격이 클수록 그 분열도 컸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작가 이상을 떠올려 봤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현재의 많은 사람도 생각이 났다. 평소엔 이런 생각을 안 했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건, 새로운 연극의 힘이다.
‘수국전망대’에 도착한 관객이 브이아르(VR) 장비를 쓰고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서울역이 보이는 ‘수국전망대’에 이르렀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 머리에 가상현실(VR) 장비를 썼다.
가상현실 안에선 2021년 서울역 낮 풍경이 보이다가 시간을 거슬러 1930년대처럼 보이는 장면이 나오면서 시간은 해체됐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인이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았다 사라졌다.
‘수국전망대’에서 브이아르(VR) 장비를 통해 본 180도 뒤집힌 서울역 모습. 국립극단 제공
공간 역시 해체됐다. 파노라마처럼 서울역 화면을 보여주다, 서서히 180도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알던 익숙한 서울을 낯선 도시 모습으로 마주 볼 수 있었다.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산책로를 오가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홀로 걷거나 앉아서 오디오를 들었다. 이들 사이에서 혼자 연극을 체험한다는 생각에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연극을 볼 땐 외롭다거나 고독하다는 걸 느낀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연극에 참가하면서 시린 고독함을 느꼈다.
나는 이렇게 다섯 곳에서 정지해 해설을 듣거나 브이아르(VR) 장비를 보면서 서울 회현동, 명동을 쏘다녔다.
공연 마지막 무대인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관객이 홀로 브이아르(VR) 장비를 쓰고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코오피와 최면약>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2부가 시작됐다. 182석 규모의 텅 빈 극장 맨 앞자리인 1열10번 좌석에 홀로 앉아 또 가상현실 장비를 머리에 쓰고 공연을 봤다.
가상 세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다가와 알약(소설에서 아스피린이라고 속인 아달린)을 억지로 먹였다. <날개>의 주인공 ‘나’가 된듯한 느낌이었다. 여인은 검은 천으로 내 눈을 가렸다. 쓰러진 나를 몇몇 남자가 들고 나갔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내 앞에서 커피를 따랐다. 조금 전에 본 서울역 풍경이 아스라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공연 마지막 무대인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관객이 홀로 브이아르(VR) 장비를 쓰고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공연은 50분 동안 이어진다. 1명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어서 30분 단위로 끊어 공연을 진행한다. 관람 가능 관객은 168명. 공연은 10월3일까지지만, 이미 매진됐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이 주변 문화시설과 연계한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국립극단은 그동안 특정 장소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여온 서현석 작가에게 서울로7017과 서계동 국립극단을 활용한 공연 제작을 제안했다.
서 작가는 서울로를 걸으며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장소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고 생각했고, 이상의 <날개>를 떠올렸다.
서 작가는 “코로나란 예상치 못한 감염병으로 오는 무력감, 폭력성, 사회의 균열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갑갑한 식민지 경성에 살았지만 답답한 일상의 틀을 뛰어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한 이상을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