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혈된 스태프의 눈을 상징하는 그림에 '우리에게 휴식을 달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IATSE 누리집
섀런 엔리케스는 드라마 <퀸스 갬빗> <맹크>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등 제작에 참여했던 미국의 베테랑 대본감독이다. 그는 “지난 8월까지 거의 식사, 휴게시간도 없이 매일 12시간 이상 10주 동안 이어진 촬영현장에서 일했다”며 “이젠 한계”라고 6일(현지시각) 미국 <엘에이(LA) 타임스>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미국과 캐나다의 카메라·메이크업·조명 종사자나 작가보조를 비롯한 영상 스태프 노동자 6만명이 속한 국제극장무대종사자연맹(IATSE)이 이번주 초 전국적 파업을 결의하며, 할리우드와 스트리밍 플랫폼(OTT) 제작사들이 초유의 제작 중단 위기를 맞고 있다. 제작사 쪽이 뒤늦게 재협상 테이블에 앉아 실제 파업으로 이어질지는 유동적이지만, 이 조직 창설 128년 만의 첫 파업 결의는 오티티 성장의 그늘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맹은 3년에 한번 표준근로계약서를 갱신해오던 고용주 쪽 단체인 영화·방송제작자연합(AMPTP)과의 협상이 지난주 결렬되자 파업 투표에 들어가, 90% 참여에 99%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했다. 미 영상업계 스태프의 전국 파업은 1945년 이후 처음인데, 당시에도 이 연맹은 대형 스튜디오 편에 섰던 터라 이번 결정은 더 주목받고 있다.
미국 할리우드 등에서 일하는 영상 제작 스태프들이 속한 국제 극장무대 종사자연맹의 사무실에 지난 4일 한 사람이 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창설 128년 만에 전국 총파업을 결의했다. 버뱅크/AP 연합뉴스
외신들은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애플티브이(TV)플러스·아마존비디오 등 오티티의 경쟁 속에 스태프들의 노동이 장시간화된 것이 파업 결의의 주요 계기라고 짚는다. 사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의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이 화제가 됐던 한국 상황과 달리, 미국은 오랜 시간 근로계약의 ‘모범’처럼 인식돼 왔다. 다음 촬영까지 10시간 이상 휴식, 식사시간 부여, 금~일요일 54시간 휴식 등이 대체로 지켜져 왔고 이를 어길 경우 제작사들은 직능별 조합에 벌금을 내곤 했다.
하지만 오티티의 성장과 코로나 확산이 이런 환경을 바꿔놓고 있다. 노동 전문매체 <레이버노트>와의 인터뷰에서 한 특수효과 종사자는 “넷플릭스 제작업체에서 7일간 106시간을 일했다. 자정 넘어 일이 끝나면 10시 이전엔 일을 시작할 수 없지만 그들은 아침 9시에 ‘강제 콜’을 한다. 그리고 벌금을 내면 그만이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대형 제작업체들로선 제작 일정 연기보다 벌금 내는 게 이익이라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촬영장의 코로나 안전책 마련, 오티티 구독자들을 늘리기 위해 스타 배우와 감독을 기용한 새 시리즈 제작 경쟁으로 비용이 치솟자,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장막 뒤’ 스태프들의 비용은 절감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스태프들의 요구엔 ‘정당한 임금’도 있지만, ‘가족과 있을 시간’ ‘밥 먹을 시간’등이 핵심을 차지한다.
또 전통적 영상제작업체들보다 오티티업체들이 스태프들의 연금과 건강보험료의 일부 재원이 되는 ‘재방영료’를 훨씬 낮게 책정한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스태프 노조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앞으로 재계약 협상이 도래할 감독이나 작가노조와의 협상에서도 불리해질 것을 제작사 쪽이 우려한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10여년 주기로 기술 혁신에 따라 격변을 겪어왔다. 가장 최근 사례는 2007년 미국 작가길드가 드라마와 영화 온라인 다운로드와 관련해 적절한 보상을 달라며 벌인 100일간의 파업이다. 당시 캘리포니아 경제가 21억달러 손실을 입고 일자리 3만7700개를 잃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난주 척 슈머 민주당 상원의원 등 의원 120명이 제작사 쪽에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며 ‘공정한 협상’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도 이런 이유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의 '국제 극장 무대 종사자 연맹'(IATSE) 사무실 건물에 조합원들의 단결을 촉구하는 포스터가 내걸려있다. 버뱅크/연합뉴스
한국 상황은 더욱 갈길이 멀다. 현장에선 4대보험 가입 등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이 예전보다 확산됐지만, 특히 방송업계의 비정규직 스태프 문제는 2016년 이한빛 피디의 죽음 이후에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는 7일 각 공영방송 신임 이사회에 비정규직 처우 개선 약속을 즉각 이행하라며 공개질의를 보냈다. 세계 영상 ‘꿈의 공장’이라는 미국과 ‘케이-드라마’를 자랑하는 한국의 씁쓸한 현주소다. 김영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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