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가영 작가의 머시니마 영상물 <kin거운 생활="">.</kin거운>
‘메타버스’는 천국도, 이상향도 아니었다.
세 여자 지혜·혜지·민지는 이 가상세계의 게임 속에 들어왔다 ‘루저’가 됐다. 자신들이 골랐던 캐릭터의 신체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사이버 여전사의 갑옷을 입은 미모의 젊은 캐릭터 민지와 엉성하고 낡은 구식 로봇 캐릭터를 입은 혜지, 앙증맞은 10대 소녀 상이지만 이미지가 깨져 온통 유리 조각들로 덮여 있는 듯한 몰골의 지혜는 낙심하며 가상공간의 육각형 집 피난처에 모여들었다.
메타버스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표상하는 아바타 캐릭터를 쓰고 들어가 놀이와 사교, 사회적 활동을 하는 웹상의 가상세계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꿈의 세계라고 상찬하는 그 공간에서 쓰라린 좌절을 맛본 그들. 민지는 자신이 고른 멋진 캐릭터가 성인 포르노물 배우로 오용된 사실을 몰랐고, 지혜는 공유 설정을 잘못해 자기만의 브랜드로 고안했던 소녀 캐릭터를 무단복제당하고 이미지가 찢어지는 곡절을 겪는다. 유약한 혜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메타버스에 들어왔다가 사귐성이 없어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나고 홀로 떠돌기만 했다. 그런 사연을 지니고 만난 그들은 서로의 상처입은 몸을 보며 ‘성적으로 착취당한 몸을 사이버 전사로 업로드했다’고, ‘마구 복제당했는데 이젠 체념했다’고, ‘몸과 마음이 다른 세계를 살아 심한 멀미를 느낀다’고 토로한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이 세계에서 어떤 희망을 캐낼까. 세 여자는 함께 고민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안가영 작가의 머시니마 영상물 <kin거운 생활="">.</kin거운>
지금 서울 강남구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에 차린 온라인 트렌드 기획전 ‘프로필을 설정하세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인 안가영 작가의 동영상물 <KIN(‘즐’을 눕힌 형태로 알파벳으로 표현한 것)거운 생활>과 <예술가들을 위한 가상세계 튜토리얼>은 요즘 청년 세대가 열광하는 ‘메타버스’ 세계의 실상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지하 2층 가장 안쪽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메타버스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신세계로 이야기되는 트렌드 이면에 현실 사회와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더 극심한 소외와 절망이 도사리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와 희망 또한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온라인 가상세계의 사건을 가상 캐릭터들이 배우 구실을 하는 역할극으로 꾸려 동영상 이미지로 만든 이 작품을,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와 기계를 뜻하는 머신을 합쳐 ‘머시니마’란 새로운 장르 개념으로 풀었다는 점도 흥미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안가영 작가의 머시니마 작품은 요즘 미술판에서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가상세계 중심의 새로운 전시 흐름을 단적으로 반영한다. 지난해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비대면 거리두기의 풍토 아래서 메타버스나 유튜브, 에스엔에스(SNS), 로보틱스 등에 초점을 맞춘 디지털 문명의 새로운 생활 문화 시스템에 촉수를 들이댄 작업과 전시 트렌드가 올여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양상이다. 기존의 백색 공간을 탈피해 다른 빛깔의 공간에서 빛과 모니터와 메타세계의 상상력을 발산하는 전혀 다른 틀거지의 미술전 트렌드를 살펴본다.
아바타 작가 라터보 아베돈의 영상물 <그 누구도 아닌 나>.
메타버스 떠도는 아바타들의 요지경
코리아나미술관의 전시 제목 ‘프로필을 설정하세요’는 에스엔에스 계정, 게임 등의 설정 단계에서 흔히 뜨는 문구다. 프로필은 ‘나’란 존재를 드러내는 도구로, ‘설정’한다는 것은 다양한 정체성을 스스로 고르고 편집하는 행위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개인이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 것을 ‘박쥐’에 비유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유산슬, 마미손, 다비 이모 등 대중문화판의 ‘부캐’ 바람과 젊은 세대들의 메타버스 열풍 등을 통해 ‘멀티 페르소나’는 보편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전시는 이런 흐름을 반영해 안 작가의 작업 <KIN거운 생활> 외에도 가상환경 작업에 기반한 국내외 작가 9명의 작업을 담아 보여준다.
미국 작가 몰리 소다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에서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설정된 정체성의 문제와, 온라인상에서 비키니 차림의 자기 몸을 선보이는 포즈를 고민하는 동영상 등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연출하고 표현하는 양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흑인 여성 작가 손드라 페리는 또 다른 가상공간의 농구 게임에 등장하는 실물 선수들의 캐릭터를 통해 발생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갈등을 역할극과 실제 이미지를 교직시키며 보여준다. 중국 작가 루양은 숱한 다국적 춤꾼들의 몸짓을 자신의 얼굴과 몸에 입혀 ‘도쿠 DOKU’라는 젠더 구분이 없는 디지털 아바타의 율동으로 보여준다. 수년간 온라인상의 아바타로 존재하며 활동 중인 가상 작가 라터보 아베돈은 클럽 등을 소재로 한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면서 가상 작가의 정체성과 권리 등에 대한 고민을 일으킨다.
사실 그동안 정체성은 개인별로 고정된 것이란 인식 아래 가면극이나 역할극 퍼포먼스 등을 통해 인종·계급적 정체성을 넘어서려는 작가 개개인의 도발적 시도를 조명한 예술 작업들이 주종이었다. 한 개인이 다중적인 정체성을 갖는 것도 예전에 ‘왜 이랬다저랬다 다른 성격을 지녔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이 강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런 다면적 멀티 페르소나가 환영을 받는 시대로 양상이 180도 바뀌었다. 이번 전시는 비대면 디지털 가상공간이 보편화하고 부캐란 말이 대중화할 정도로 개인의 정체성이 다면화한 현재의 격변한 풍토를 예술로 반영하려는 첫 시도로 풀이된다.
정문열 작가의 광섬유 설치작품 <소리의 나무>.
첨단기술과 예술이 녹아든 가상정원
광주시립미술관에 차려진 ‘메타-가든’전(11월14일까지)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레이저 광선이 난무하는 산책 공간과 환상적인 빛선을 그리는 광섬유의 숲이다. 정체성과는 다른 맥락인 현대미술과 첨단과학기술의 융합에 초점을 맞췄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작업해온 금민정, 노상희, 박고은, 소수빈 작가와 디지털 영상화 설치를 중심으로 한 김형숙, 박상화, 서상희, 손봉채, 윤제호, 이진준, 정문열 작가 등 기존 작가들과 다른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에 기반해 작업해온 11명의 근작들이 나왔다. 메타버스란 가상환경 콘셉트를 다루되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의 정체성보다 디지털 기술문명이 품은 미적 상상력을 시각화하고 일종의 예술 정원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문열 작가의 공학기술을 이용한 사이보그 작품 <소리의 나무>를 지나면, 윤제호 작가가 디지털 공간 <휴식동굴>에서 빛과 소리의 파장으로 찬 가상의 자연을 체험하게 한다. 특히 남태평양 바닷속을 직접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대형 화면 속에 관객의 실루엣이 비쳐 보이는 이진준 작가의 <모아나이아>(MOANAIA)는 바닷속의 생태적 상상력이 가상환경을 만드는 테크놀로지 작업을 통해 재현된 결과물로 주목된다.
박상화 작가의 프로젝션 맵핑 설치작품 <공중비디오정원>.
지금 펼쳐진 디지털 기획전시들의 큰 화두는 메타버스 같은 가상환경에서 활동하면서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바일로 빠르게 넘나드는 요즘 엠제트(MZ)세대를 중심으로 한 현대인의 다양한 얼굴과 감수성을 예술 작업을 통해 조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인터넷 디지털 환경에 대한 이야기들을 큰 범주에서 전시들이 다루긴 했지만 , 두루뭉술한 전체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정체성이 어떻게 다면적으로 변화하는가 , 그에 따른 이슈는 무엇인가를 미술계에서는 처음 본격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곱씹어가며 볼 만한 작품 마당으로 비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