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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국 방송엔 없었던 진짜 언니들의 싸움

등록 2021-10-26 04:59수정 2021-10-27 18:19

화제의 댄스 배틀 엠넷 ‘스우파’ 관전기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계급별 미션에 참여한 각 크루의 리더 계급 댄서들. 엠넷 제공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계급별 미션에 참여한 각 크루의 리더 계급 댄서들. 엠넷 제공
폴라 압둘이라는 가수가 있다. 1988년 말에 데뷔곡 ‘스트레이트 업’(Straight Up)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이듬해 나온 앨범에서는 무려 네 곡의 빌보드 차트 1위가 나왔다. 당대 최고의 여성 가수는 마돈나, 휘트니 휴스턴과 재닛 잭슨이었다. 누구도 여성 팝의 삼위일체에 도전할 용기가 없었다. 폴라 압둘은 그 어려운 걸 데뷔 앨범으로 해냈다. 재미있는 건 1989년에 재닛 잭슨이 그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리듬 네이션 1814>(Rhythm Nation 1814)를 냈다는 사실이다. 이게 왜 재미있냐고? 폴라 압둘은 원래 재닛 잭슨의 안무가였다.

그러니 1989년은 역사상 가장 춤을 잘 추는 두 명의 여성 가수가 맞붙은 해로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한 명은 이미 정상의 가수였다. 다른 한 명은 그의 안무가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여성 라이벌을 좋아한다. 비슷한 나이의 여성 가수들이 등장하면 세상은 어떻게든 그들을 라이벌로 명시한다.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케리,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니키 미나즈와 카디비를 한 번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상정하고 그들 사이가 딱히 평화롭지 않다는 증거를 어떻게든 캐내려 애쓴다. 심지어 사제지간이었다고? 사제지간! 라이벌! 스캔들!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홀리뱅. 엠넷 제공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홀리뱅. 엠넷 제공
폴라 압둘과 재닛 잭슨의 앨범은 용호상박이었다. 당시의 타블로이드들은 둘 사이가 나쁘다는 기사들을 써댔다. 그러나 둘 사이는 나빴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둘은 오히려 지난 30년 동안 서로에 대한 존경을 표해왔다. 여성 댄서 크루들의 경쟁을 다루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의 첫회를 본 순간 나는 이것이 오래된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의 리얼리티화라고 생각했다. 제작사 엠넷은 교묘하게 팀을 짰다. 이를테면 ‘홀리뱅’ 크루의 리더인 허니제이는 ‘코카엔(N)버터’의 멤버들과 오랜 악연이 있었다. 원래 함께 춤을 췄던 그들은 사이가 나빠져서 두 개의 크루로 나뉘었다. 지난 몇년간 대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원트’의 로잘린은 ‘프라우드먼’의 립제이와 악연이 있었다. 립제이는 로잘린의 스승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둘의 사이는 갈라졌다. 사제지간! 라이벌! 스캔들!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코카N버터. 엠넷 제공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코카N버터. 엠넷 제공
악연이 있는 멤버들을 굳이 무대에서 싸움 붙이는 엠넷의 행각에 나는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다. 세상의 많은 티브이 프로그램들은 여성들의 공개된 싸움을 은밀히 즐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를테면 나의 길티플레저 중 하나는 넷플릭스 시리즈 <셀링 선셋>이다. 엘에이(LA) 부자 동네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는 여성들의 삶을 다루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가장 좋은 거래를 쟁취하기 위해 연대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중 한 명은 “제가 나쁜 ×을 묻을 때 옆에 삽을 들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죠”라고 말한다. 나는 그 대사에서 약간 멍해졌다. 이 프로그램이 ‘여적여’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토록 솔직하게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을 한국 티브이에서는 본 적이 있던가?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훅. 엠넷 제공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훅. 엠넷 제공
맞다. 세상은 적으로 가득하다. 여적여도 있고 남적남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적남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드라마 <여인천하>라도 되는 듯 여성들만이 적을 만들고 대립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스우파>에도 적은 있다. <스우파>의 여성들은 완벽하지 않다. 서로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서 서로에 대해 존경을 표하기도 하고 다른 팀 퍼포먼스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서 지나치게 훈련되어 ‘인성 논란’이 벌어질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돌 오디션 리얼리티와는 다르다. <스우파>의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실력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전투를 벌인다. 전투를 준비하며 마음의 전투를 카메라 앞에서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는 멋지게 승복한다. 나는 ‘뜨거운 승부욕과 우정’은 남성들만의 영역인 양 간주하던 오랜 편견을 <스우파>만큼 근사하게 박살내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다. ‘여적여’라는 단어는 <스우파> 이후에 다시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라치카. 엠넷 제공
엠넷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크루 라치카. 엠넷 제공
7화 ‘맨 오브 우먼’ 미션이 처음 제시됐을 때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근심했다. 여성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에 굳이 남성 댄서를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우파>의 댄서들은 각자의 근사한 방식으로 남성 댄서들을 이용한다. 극단적인 남성성을 끌어오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지우기도 하고, 게이 댄서들과 드래그퀸을 데려와 젠더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공통의 무기로 경쟁하고 있지만 여성에게는 수많은 다른 얼굴들이 입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건 우리가 한번도 한국 티브이의 세계에서 보지 못한 ‘진짜 언니들 싸움’이다.

김도훈 작가 겸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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