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해 줘야죠.”
드라마 <지리산>(티브이엔) 2회에 나온 현조(주지훈)의 대사는, 어설픈 시지(컴퓨터그래픽)와 산만한 편집에 실망해 일찌감치 하산하려던 시청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대사 전후로 나오는 공동 제사 장면이 주는 울림도 컸다. 아픈 우리 역사를 촘촘히 새긴 장면까지. 연출의 아쉬움을 걷어내고 보니 <지리산>은 내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억해 주면 안 될까요?” 드라마에는 잠깐 나오지만 간접광고(피피엘), 시지에 묻히기에는 아까운 <지리산>에 담긴 의미있는 장면을 찾아봤다.
2회 공동제사? 98년 대원사 계곡 수해
“대체 누구 제사이기에 (이 많은 사람이).” 2회 한자리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현조는 시청자의 모습이다. 공터 한쪽에 마련된 제사상에는 구조대원들,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 마을 주민들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강(전지현)의 부모 사진도 있다. 극 중 1995년 지리산에서 있었던 도원계곡 수해 사건 사망자들이다.
드라마에서는 몇분밖에 안 되지 짧은 장면이지만 그 속엔 23년의 아픔과 그리움이 녹아 있다. 1998년 7월 지리산에서 실제 있었던 대원사계곡 수해를 그대로 가져왔다. 지리산 계곡지역에 300mm 넘는 비가 쏟아지는 등 계곡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사망, 실종자만 100여명에 이른다.
책 <지리산 국립공원 50년사>는 이 사건을 두고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표현했다. 권욱영 국립공원공단 단장은 “아직도 주검을 발견하지 못한 분도 있다”며 “공동 제사는 지금도 지낸다”고 말했다.
3회 총알나무…양민학살의 아픔
3회에 등장하는 금례(예수정) 할머니는 어렸을 때 잃은 어머니를 추모하려고 1년에 몇번씩 백토골에 있는 총알나무에 간다. 그곳에 놓여 있던 요구르트를 마신 뒤 환각 상태에 빠진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저 멀리 화염 가득한 어둠 속에서 한복을 입은 여자 아이가 뛰어온다. 아이 뒤로 손을 내미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주머니와 교복 입은 학생들. 그들을 향해 쏘아대는 듯한 총소리. “탕탕탕탕탕.” “예전에 여기서 양민학살이 있었거든. 그래서 우린 총알나무라고 불러.”(이강)
이 장면은 실제 지리산에서 자행된 양민학살을 녹인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경남 산청군 외공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학살된 민간인 유골 240여구를 발굴했다. 이는 2000년 시민단체가 발견한 150구를 포함했다. 외공리에는 오래 전부터 한국전쟁 중에도 민간인이 군용트럭에 실려 와 총살당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지역에 견줘 진상규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금례 할머니가 지리산에서 양민학살의 환영을 보는 장면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드라마에 나오는 총알나무는 제작진이 만든 것이다. 드넓은 지리산 속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1회 빨치산 표식
1회에서 현조는 실종된 승훈을 상수리바위 밑에서 찾아낸다. 그 안에서 사각형의 표식을 발견한다. 극 중에서 솔(이가섭)은 “빨치산들끼리 사용하던 연락 수단이다. 부대에서 낙오되거나 연락이 두절됐을 때 이런 식의 암호를 남겨 연락한 것”이라며 값진 발견이라고 좋아한다.
실제 지리산에는 빨치산들이 지내던 바위 밑 비밀아지트가 많다.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표식을 만들어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표식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권욱영 단장은 “그 신호를 어떤 모양으로 주고받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했다. 드라마에선 제작진의 방식대로 의미가 더해진 셈이다. 극 중 해동분소는 뱀사골 탐방안내소인데, 뱀사골 입구는 빨치산토벌 전적기념관이 있던 곳이다.
생태복원센터…반달가슴곰
<지리산>에는 생태복원센터 연구원을 등장시켜 지리산 보호동물의 중요성, 멸종위기종의 보호 등도 이야기한다. 4회에 구렁이 실종 사건을 다루면서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레인저 이야기인 만큼 빼도 무방하지만, 작가는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대사로도 친절하게 지리산에서 하는 일을 설명한다. “멸종위기종인 구렁이 생태연구 때문에 구렁이 열 마리한테 칩을 내장해서 방사했다”거나 “곰뿐이냐, 고라니, 너구리, 구렁이… 지리산에서 나는 동물 식물은 싹 다 여기서 연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식이다. 실제로 지리산 국립공원에는 반달가슴곰관리팀이 있다.
김은희 작가는 이강의 부모를 대원사 계곡 수해의 사망자로 설정하고, 양민학살을 겪은 할머니를 등장시켜 시청자들이 그 사건을 찾아보고, 떠올리게 했다. 후반부에 갈수록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일들은 더 많이 등장한다 . 작가는 전작 <킹덤>에서는 좀비를 소재로 민초들의 아픔을 이야기했고, <시그널>에서는 장기미제사건을 다루며 공소시효는 폐지됐어도 잊지 말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기억해 줘야 한다”는 현조의 대사는 작가가 자신에게, 그리고 시청자한테 하는 부탁은 아닐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