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세기의 발굴, 성급한 전시

등록 2021-11-22 04:59수정 2021-11-22 21:27

[노형석의 시사 문화재]
인사동 출토 유물 공개전
구텐베르크보다 빠른 금속활자
실물까지 동시 확보 성과
다소 급박한 전시 진행 아쉬워
서울 인사동 피맛골 출토 한글 금속활자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서울 인사동 피맛골 출토 한글 금속활자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ㅭ, ㆆ, ㅸ, ㅿ, 쏘, 앙, 차, 숭….

그 모양이 참으로 따듯하고 함함했다. 허연 진열장 위에 400여년 묵은 세월을 드러낸 한글 활자들엔 유물 특유의 강퍅한 느낌이 없었다. 오래 땅속에 묻혀있었던 터라 검붉게 녹슬었고 지금 쓰지 않는 글자들도 부지기수였지만, 소박하고 튼실한 글자체의 품이 믿음직스러웠다.

자모가 정교하고 엄정한 짜임새를 이루면서도 정감이 넘실거리는 진열장 속 글자들은 순경음( ㅱ, ㅸ,입술을 거쳐 나오는 가벼운 소리)과 반치음(ㅿ가벼운 시옷 여린 시옷), 그리고 당시 중국 한자음 표기에 썼던 경음 표기를 위한 활자들이었다.

지난 6월 말 서울 인사동 피맛골 땅속에서 출토돼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조선 세종~세조 대 금속활자들이 이달 초부터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인사동 출토 유물 공개전’(12월31일까지)이란 제목으로 선보이고 있다. 일종의 발굴성과 소개전이다. 겨레 특유의 미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글 활자체들의 살가운 자태들이 다시 세상에 나온 곳은 대규모 도심 복합공간 재개발을 앞둔 인사동 79번지 일대, 그러니까 1970~90년대 옛 막걸리 주점거리 아래쪽 십여미터 지하 지층 속이었다. 16세기 평민의 집터 창고 한가운데에 파묻힌 대형 옹기 같은 토기 속에 파묻혔다 기적적으로 드러난 활자들을 학계 전문가들이 긴급 분석한 결과가 놀라웠다. 상당수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본보다 시기가 이른 세종~세조 시기 갑인자로 판명되거나 세조대의 초기 한글 활자로 판명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일부가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의 중국 한자음을 한글자로 표기하기 위해 간행된 주해서인 <동국정운>의 표기법을 쓴 활자로 드러나 더욱 학자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큰 의의는 한글의 사용 시기에 근거해 15~16세기 조선 전기로 판단할 수 있는 진본 활자들이 다수 출토된 점이다. 특히 세조 대인 1455년 제작한 을해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다 20년 이른 세종대의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점은 유례가 없다. 갑인자는 조선 초기 금속활자로서 각종 사료 및 기록과 일치하는 중요한 실물자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시기(1450년경)보다 이른 시기의 조선활자 유물은 인쇄본으로만 전했으나, 이번에 금속활자까지 확보하게 됐다.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 개최를 하루 앞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들머리에 금속활자를 본뜬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본격적인 관람에 앞서 해당 전시물을 직접 만져보며 금속활자를 이해할 수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 개최를 하루 앞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들머리에 금속활자를 본뜬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본격적인 관람에 앞서 해당 전시물을 직접 만져보며 금속활자를 이해할 수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금속활자 출토 뒤 기초적인 연구 분석과 전시 과정에 대해 학계가 마냥 갈채만 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출토품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소수 전문가들만 국립고궁박물관과 문화재청의 후속 분석에 참여해 다소 급박하게 전시를 진행한 데 대해 학계 곳곳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분명한 건 국내 학계가 출토된 금속활자들 가운데 규명된 것보다 훨씬 많은 활자들, 그것도 한글 활자들의 구체적인 실체를 거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시장에 나왔지만, 제대로 연대나 특징이 분류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놓인 수많은 미확인 한글 활자들이 이런 현실을 말해준다. 한자 활자는 1434년 세종 때 만든 조선의 대표적 금속활자인 갑인자 실물과 1455년 세조 때 찍은 을해자 실물, 1461년 찍은 을유자 실물들을 그 활자들이 찍혀 고증의 근거가 된 <근사록> <능엄경> <원각경> 등 문헌과 함께 비치해 나름 분류해놓았다. 하지만, 한글 활자는 이른바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확실하게 눈으로 판독되는 112자의 한글활자를 국보 <동국정운>이 비치된 진열장 안쪽에 따로 추려놓았을 뿐, 다른 한글 활자들은 연대와 자체의 특징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나 분류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미확인 글자로 뭉뚱그려 다른 진열장에 몰아놓았을 뿐이다. 전시를 준비한 이상백 학예사는 “동국정운식 표기가 있는 한글활자 실물은 몇 개인지 정확히 세지 않았다. 사실 분류하지 못했고, 파악하지 못했다. 이 활자들이 제작 연대가 언제이고, 어떤 종류의 간지명 활자인지는 규명되지 않아서 좀 더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는 서울 인사동 피맛골 출토 한글 금속활자들. 일부가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 썼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활자로 드러났지만, 아직도 상당수 활자들의 정확한 실체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형석 기자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는 서울 인사동 피맛골 출토 한글 금속활자들. 일부가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 썼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활자로 드러났지만, 아직도 상당수 활자들의 정확한 실체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형석 기자
국내 한글 금속활자체 실물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해본 전례가 매우 드물어 연구 기반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한 전례는 2007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박물관 시절부터 전해지던 소장 활자 40만점 가운데 700여점에 불과한 한글 금속활자를 분석한 결과다. 이 활자들 가운데 30여점이 세조 7년(1461) 간행한 불경인 <능엄경>을 한글로 옮긴 <능엄경언해>를 간행할 때 쓴 금속활자 ‘을해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짚으면서 그 실물들을 공개한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래로 한글은 사대부들에게 언문으로 격하되어 천시받아온 수난의 길을 걸었는데, 금속 활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세조 대 만든 정감 있고 장엄한 고딕체 한글 활자들은 경자자, 갑인자, 을해자 같은 간지를 붙인 정식 활자체명으로 이름 붙여진 적이 없다. 실물을 거의 보지 못했고 연구 성과가 널리 공유된 적도 없기에 활자체의 변화 과정, 실물의 금속 성분, 명칭이나 특징 등에 대해 학계 차원에서 널리 통용되는 개념 틀은 물론 논의도 별반 진행된 적이 없다. 고궁박물관 공개전에 나온 한글 활자들이 체계적으로 분류되거나 설명이 되지 못한 데는 이런 일천한 연구기반의 한계가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들이 쏟아진 서울 인사동 79번지 피맛골 발굴 현장. 조사원이 지하 지층의 16세기 건물 터에서 발굴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조선 전기 금속활자들이 쏟아진 서울 인사동 79번지 피맛골 발굴 현장. 조사원이 지하 지층의 16세기 건물 터에서 발굴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글자 뭉치들과 녹슨 글자들의 내용을 보존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관찰 분석하고, 에이아이(AI) 등의 첨단 기법으로 비파괴조사를 해보면 조선 전기 인쇄본으로만 확인되던 여러 활자들 실물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까지 있다. 기대되는 건 아직 미궁에 싸인 한글 활자들의 역사적 진실이다. 심층적인 추가 조사를 통해 세종대 수양대군(세조)이 만든 <석보상절>에 인쇄된 한글 활자가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세계 최고 금속활자 보유국이라는 헌사를 즐겨 쓰지만 자부심에 걸맞은 금속 활자 실물 연구 기반이 부실했던 국내 학계의 현실에서 출토된 금속 활자들은 축복이면서 죽비인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