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케이(K)컬처’가 전세계를 홀린 해였다.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최대 흥행작이 됐고, 방탄소년단(BTS)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대상(‘올해의 아티스트’)을 탔고, 윤여정이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이처럼 빛나는 주역 뒤에는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닦아온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세밑을 맞아 숨은 보석 같은 이들을 조명하고자 기자들이 선정했다. 이름하여 ‘2021 한겨레 문화 어워즈’(HMA)다.
볼매 배우상 ㅣ <디피> <모가디슈> 구교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올해 활약한 배우들 가운데 단 한명의 ‘볼매’(볼수록 매력) 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구교환이다. 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디피>(D.P.)에서 능청스러우면서도 따스한 인간미를 지닌 한호열 역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탈영병 체포조라는 무거운 소재의 드라마에 활력과 재미를 더한 것은 구교환의 익살맞은 연기다. 그는 <디피> 외에도 지난해 영화 <반도>부터 올해 <킹덤: 아신전> <모가디슈>까지 스크린과 오티티(OTT)를 넘나들며 매력 발산 중이다. 특히 <모가디슈>에선 냉철하면서도 정 많은 북한 보위부 요원 역을 인상적으로 선보였다. 올해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을 받은 대세 배우인 그에게 팬들은 따져 묻는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눈물 쏙 뺀 다큐상 ㅣ <노회찬6411>
다큐 영화 <노회찬6411> 스틸컷. 명필름 제공
지난 10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노회찬6411>은 노회찬 3주기를 맞아 그가 우리 곁에 남기고 간 흔적들을 되짚는 영화다. 영상 속에서 그는 강자들의 폭력과 횡포에 맞섰고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 곁을 지켰다. 가장 낮은 자리에 손을 내밀어 같이 비를 맞았다. 그러면서도 유머와 해학을 잃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한때 우리에게 노회찬이 있었음을, 그리하여 이제 노회찬마저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됐다. 그의 부재는 자명했지만, 그걸 확인하는 것은 눈물겨운 일이었다. 그가 꿈꿨던 누구나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고, 고난받는 이들은 오늘도 벼랑 끝이다. <노회찬6411>은 묻는다. 그가 떠난 세상에서 남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미워할 수 없는 빌런상 ㅣ <구경이> 케이(김혜준)
드라마 <구경이>에서 케이 역을 맡은 김혜준. 제이티비시 제공
정의, 여성, 다양성. 2021년 드라마계는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다. <모범택시> <마우스>처럼 현실 사건을 드라마에 대입해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동시에 복수혈전을 감행하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원더우먼> <구경이> <연모> 등 주체적인 여성을 내세운 드라마도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중에서 단연 돋보인 여성 캐릭터는 <구경이>(제이티비시)의 연쇄살인마 케이. 치밀하게 설계한 범죄, 죽을 만한 놈만 죽인다는 철학, 살인 현장에서도 해맑게 웃는 천연덕스러움 등은 새로운 여성 ‘빌런’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케이를 연기한 배우 김혜준은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시즌 1·2에서 어린 계비 조씨 역을 맡아 연기가 어색하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케이 역을 통해 2022년 가장 기대되는 배우로 평가받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찌질미상 ㅣ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김성남(백현진)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김성남(백현진). 웨이브 제공
토종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의 오리지널 시리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상청)는 ‘올해의 오티티 시리즈’로 손색이 없다. 대형 사고를 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후임으로 청와대가 야당 의원 출신의 이정은(김성령)을 깜짝 발탁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블랙코미디다. 이정은을 비롯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넘치는데,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이정은의 남편인 시사평론가 김성남(백현진)이다.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진보 담론을 견지하는 ‘뇌섹남’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남들 눈에는 “유시민이 되고픈 잔잔바리”일 뿐이다. 아내를 적극 지원하는 듯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열등감과 질투심을 폭발시키는 그는 이 시대의 한 단면을 표상하는 ‘찌질미’의 정수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할벤져스상 ㅣ 송해·이순재·강부자·박정자·오영수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배우 오영수. 넷플릭스 제공
칠순·팔순·구순의 원로 배우들이 영상과 무대에서 왕성한 노장 파워를 과시한 한 해였다. 국내 최고령 현역 연예인 송해(94)는 연예인이란 직업 뒤에 가려진 인간 송해에 초점을 맞춘 다큐 영화 <송해 1927>에 출연했다. 이순재(87)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원전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3시간20분짜리 연극 <리어왕>에서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다. 강부자(80)는 친정엄마와 말기 암 환자 딸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에 윤유선과 함께 출연했다. 박정자(79)는 80살 모드와 19살 해롤드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해롤드와 모드>에 나왔다. 오영수(77)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글로벌 스타가 됐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판 뒤집은 언니들상 ㅣ <스트릿 우먼 파이터>
엠넷 <스트릿 우먼 파이터> 리더 계급 미션 장면. 엠넷 제공
무대를 박살 낼 듯한 파워에 빠져든다. 서로를 향한 훈훈한 경쟁에 마음이 움직인다. 그저 스타를 빛내는 장치에 불과했던 이들의 격렬한 몸짓에 감동이 일렁인다.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오래된 편견을 한 방에 날려버린 연대에 찬사가 쏟아진다. 엠넷(Mnet) 예능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얘기다. 실력을 갖춘 여성 댄서들의 경연 프로그램인 스우파는 첫 방송이 나간 8월24일부터 종방한 10월26일까지 줄곧 화제였다. 춤만으로 새로운 예능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올해 방송계를 뒤집었다. 스우파는 지상파, 종편, 케이블 등 29개 채널 프로그램 대상 콘텐츠 영향력 지수(CPI) 부문에서 올해 가장 많은 열 차례나 1위를 차지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진주보다 더 고운상 ㅣ 50돌 맞은 ‘아침이슬’
‘아침이슬’ 녹음에 참여한 가수들. 경기문화재단 제공
‘아침이슬’이 실린 <김민기>(1971)는 서슬 퍼런 독재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 열망을 담은 기념비적 앨범이 됐다. ‘아침이슬’ 50돌을 맞은 올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민기 헌정 앨범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게 헌정하다>가 제작됐다. 장르와 세대를 망라한 뮤지션들이 함께했다. 가수로는 권진원·나윤선·노래를 찾는 사람들·박학기·알리·웬디(레드벨벳)·윤도현·윤종신·이날치·이은미·장필순·정태춘·크라잉넛 등이 참여했다. 학전 뮤지컬 무대에 섰던 배우를 대표해 황정민도 합류했다. 김형석·조동익·윤일상·박인영 등 시대를 빛낸 뮤지션이 편곡을 맡았다. 이후 ‘아침이슬 50주년 콘서트’가 <열린음악회>(한국방송1), 경기아트센터, 롯데콘서트홀 등에서 열렸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숨은 보석 노래상 ㅣ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 표지. 유어썸머 제공
“마녀가 나타났다/…/ 폭도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단이 나타났다” 싱어송라이터 이랑이 지난 8월 발표한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의 동명 타이틀곡 가사다. 이상한 자들 탓에 대혼란에 빠진 사회상을 노래한 것 같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숨은 진실이 드러난다. 마녀의 정체는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우는 가난한 여인이고, 이단의 정체는 일하고 걱정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라 읍소해도 굳게 닫힌 도시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랑이 <캘리번과 마녀>라는 책을 읽고 가사를 썼다는 이 노래를 광장에서 많은 사람이 외치고 노래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안 오길 바라지만.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알찬 리허설상 ㅣ 야프 판즈베던 지휘 KBS 교향악단 공연
뉴욕필하모닉 음악감독인 야프 판즈베던이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을 지휘하기에 앞서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클래식 음악 공연의 8할은 리허설에서 결정된다. ‘못난 리허설에 뛰어난 공연’을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뉴욕필하모닉과 홍콩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동시에 맡고 있는 야프 판즈베던(얍 판 츠베덴)은 세세하고도 깐깐한 리허설로 유명하다. 올해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추면서도 단원들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마른오징어를 쥐어짜서 진액을 뽑아내는 리허설’이라고 단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호랑이 지휘자’는 10월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과 프로코피예프의 5번 교향곡을 지휘하며 리허설에서 응축해낸 단원들의 집중력을 잘 다듬어진 고품질 사운드로 빚어냈다. 작은 디테일이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미세한 차이가 예술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그의 지론대로였다. 다수의 음악 평론가들이 ‘올해의 클래식 공연’으로 이날 무대를 꼽았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국제 부문] 웃픈 영화상 ㅣ 넷플릭스 <돈 룩 업>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제니퍼 로런스, 메릴 스트리프, 케이트 블란쳇, 티모테 샬라메, 아리아나 그란데…. 휘황찬란한 출연진의 이 영화가 지난 8일 극장 개봉했을 땐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런데 24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자마자 재밌다고 난리가 났다. 넷플릭스 제작 영화 <돈 룩 업>이다. 천문학과 대학원생이 발견한 혜성이 6개월 뒤 지구와 충돌해 파멸한다는데도, 대통령은 중간선거만 생각하고, 언론은 연예인 스캔들처럼 가벼운 가십거리로만 취급한다. 대중도 인터넷 밈을 만들어 희화화하는 데만 골몰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사이 점점 더 다가오는 혜성은 기후위기를 상징한다고 애덤 매케이 감독은 밝혔지만, 다른 그 어떤 사안을 넣어도 지금 현실과 찰떡처럼 맞아떨어져서 더 ‘웃프’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