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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땀 한땀 채워낸 견고한 그림, 자수

등록 2022-03-26 09:59수정 2022-03-26 19:02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서울공예박물관 ‘자수, 꽃이 피다’

마치 붓터치 같은 실의 자국들로
화려하게 채워넣은 바위, 꽃, 새
작은 골무까지 수놓은 정성에서
공간을 넘어서는 힘마저 느껴져
<자수 매화도 병풍>(세부), 19∼20세기.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자수 매화도 병풍>(세부), 19∼20세기.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공예 작품을 감상하는 최고의 방법은 아름다움 속에 비쳐 나오는 사람의 수고와 시간의 흔적을 함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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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인왕산이 넘겨다보이고, 뜰에는 새봄의 꽃이 피어난다. 지난해 조선 시대 별궁터 위에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 건물은 70여년 된 학교 건물 다섯채를 잇고 고친 것이다. 겹겹의 역사적 맥락 위에 자리하고 있지만 과한 의미 부여나 스토리텔링은 없다. 밝고 산뜻하게 단장한 박물관은 마당으로, 다시 실내로 빛이 성큼성큼 들어와 밝고 산뜻하다.

안내동에 들어서자마자 마주 보이는 것은 박물관 가게다. 동시대 공예가들이 만든 소품들을 만져보고 들어보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가벼운 활기가 먼 옛날 만들어진 유물들을 둘러보는 눈길까지로 이어질 수 있을까. 전통, 역사, 장인, 예술 등 공예박물관이라는 이름이 연상시키는 묵직한 낱말들도 덩달아 가뜬해지는 기분이다.

전시 ‘자수, 꽃이 피다’는 1960년대부터 자수와 보자기 등을 수집해온 허동화·박영숙 선생의 기증품 5천여점을 토대로 꾸린 직물관의 상설 전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전시실 디자인에 실제 자수 장식을 활용한 것이다. 전시 제목은 혼례에서 신부가 입는 활옷을 연상시키는 다홍색 벽에 금색 실로 만든 자수 글씨를 넣었다. 이 도입부는 전시에서 만나게 될 화려한 자수 공예 작품들에 대한 직관적인 예고다. 벽면의 설명문에도 전시작 속 꽃과 새 자수 장식이 더해져 있다. 그래서 5부로 구성된 전시 자체가 하나의 자수 병풍처럼 한 폭 한 폭 펼쳐지는 느낌을 준다. 

&lt;자수 화조도 병풍&gt;, 19세기 말~20세기 전반.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자수 화조도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전반.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그림에 견줄 만한 자수 병풍

전시의 주인공은 자수 병풍이다. 조선에서는 19세기부터 그림이 여러장 들어간 병풍으로 방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이 유행의 시작은 궁궐이었다. 궁수(宮繡)라고 부르는 궁궐식 자수는 실제 그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다양한 색감과 세밀한 묘사를 보여준다. 전시실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자수 화조도 병풍>은 바위와 꽃가지에 앉은 새들을 표현한 것이다. 폭마다 과감한 바탕색을 다르게 배치하고, 자수는 꽃잎 한장에도 서너가지 색이 들어가 다채로움이 돋보인다.

궁궐에서 장식으로 만들어 쓰던 자수 병풍은, ‘궁양’(宮樣)이라고 하는 궁궐식 스타일을 선망하던 사람들에게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사람의 공이 몹시 많이 드는 자수 그림을 열 폭, 열두 폭씩 넣은 것이니 무척 값비싼 사치품이었지만, 부유한 이들은 앞다투어 대형 자수 병풍을 사들였다.

그 유행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 올해 봄을 맞아 새로 전시에 나온 <자수 매화도 병풍>이다. 검은 바탕에 두껍게 꼰 노란 실로 힘 있게 뻗어 난 매실나무에 매화가 만개한 모습을 수놓았다. 이 작품은 당시 매화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도화서 화원 양기훈(楊基薰, 1843~1919 이후)의 그림을 본뜬 것이다. 그의 매화도를 밑그림으로 삼은 자수 병풍은 궁수와 민간에서 만든 민수품이 모두 여러점 전해지고 있어 당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자수 묵죽도 병풍>은 병풍 안에 그림과 자수가 함께 들어간 독특한 작품이다. 세 폭은 청나라 서화가 이병수(李秉綬)의 그림을 자수로 표현하고, 그 사이에 서화가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이 그린 죽란도를 배치했다. 수묵화의 농담까지 감쪽같이 구현한 댓잎을 보면 자수가 실로 그린 그림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작품 앞에서는 농담의 그러데이션을 가만히 따라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lt;자수 묵죽도 병풍&gt;, 일제강점기.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자수 묵죽도 병풍>, 일제강점기.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평수나 자릿수 같은 자수 용어를 잘 모르더라도, 붓 터치처럼 수직과 수평, 사선으로 실이 나아가고 멈춘 자국들이 차츰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한 땀, 한 땀’이란 말의 그 바늘땀이 얼마나 작은지 말이다. 그러고 나면 병풍 위로 커다란 화폭을 견고하게 채워낸 자수 장인들의 시간이 잠시 겹쳐 그려질지도 모른다. 나는 공예 작품을 감상하는 최고의 방법은 아름다움 속에 비쳐 나오는 사람의 수고와 시간의 흔적을 함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이어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예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해 아름답다고 더 큰 목소리로 답할 수 있게 된다.

이름 없는 이들을 작가로 호명

직물은 유물들 가운데서도 특히 온습도 변화에 예민하고 빛에 쉽게 상하는 소재이므로 오래 전시하는 것이 어렵다. 이 전시도 최근 작품 몇점이 교체되었는데, 그중 고려 때 만들어진 <자수 사계분경도>는 실물이 있던 자리에 작품의 초고화질 영상과 촉각 전시대를 배치했다. 영상이나 촉각 전시는 기존 박물관 전시들에서도 활용되고 있지만, 이 전시에서는 이들이 레플리카(복제품)나 감상 도구가 아닌 전시품으로서 자리하고 있어 흥미롭다.

또 자수의 톡톡한 결이나 꼰실과 푼실의 질감 차이를 직접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촉각 전시는 시각장애인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시각 외의 감각을 활용해 유물을 감각하고 경험하게 한다. 유물 정보도 실제 유물 못지않은 박물관의 자산이 되어가고, 박물관이 유물을 ‘보는’ 곳이 아니라 더 다양하게 감각하고 경험하는 곳으로 변하고 있음을 체감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 전시에 나온 유물들은 대개 조선 후기와 근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귀한 유물을 일찍 알아본 이들이 잘 보존한 덕도 있겠지만, 당시 사회가 여성은 바느질과 자수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결과임을 전시는 언급한다. 그래서 근대 여성들이 사용하던 침선 도구들과 <자수 책가도 병풍>이 엇갈려 마주 선 전시 말미는, 이름을 알 길 없는 과거의 제작자들을 자수 작가로서 다시 새기고 호명하는 느낌을 준다.

전시에 출품된 골무들.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전시에 출품된 골무들.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이들은 실패, 바늘집, 심지어 골무에도 알록달록한 수를 놓았다. 수십개의 골무가 같은 무늬, 같은 빛깔이 없이 제각각이라 마치 사람 얼굴처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충분히 보고 돌아서 나서다가 다시 전시실로 돌아와 골무들을 한번 더 둘러보았다.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공간도 제 솜씨를 베푸는 무대로 삼았던 성실한 마음에는 분명 공간을 넘어서는 힘이 있음을 믿고 싶어지는 봄이기 때문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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