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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양지로 나온 ‘BL’…퀴어 서사 대중화, 그 거대한 변화의 시작

등록 2022-03-31 09:59수정 2022-03-31 10:34

온라인 뒤흔든 ‘시맨틱 에러’
OTT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동명의 웹소설·웹툰 실사화
성소수자가 겪는 혐오 빼고
남성간 사랑 판타지로 그려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주인공 추상우(박재찬·오른쪽)와 장재영(박서함)이 강의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돌 그룹 크나큰을 탈퇴하고 은퇴를 결심했던 박서함은 <시맨틱 에러> 출연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왓챠 제공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주인공 추상우(박재찬·오른쪽)와 장재영(박서함)이 강의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돌 그룹 크나큰을 탈퇴하고 은퇴를 결심했던 박서함은 <시맨틱 에러> 출연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왓챠 제공

2022년의 한국 연애 드라마는? 사실 이 질문은 12월 즈음에나 던져야 마땅하다. 2022년은 아직 9개월이나 남았다. 하지만 내 답변은 이미 정해졌다. 지금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뒤흔들고 있는 <시맨틱 에러>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시맨틱 에러>는 한국 연애 드라마의 협소한 세계 속에서 새로운 장르를 하나 개척해버린 문제작이다. 이미 <시멘틱 에러>를 모두 시청한 사람이라면 내가 지나치게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쉿. 당신도 그 드라마를 보며 내적 호들갑에 온몸을 떨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당신이 가명으로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팔로워들도 알고 있다.

<시맨틱 에러>는 토종 오티티(OTT) 왓챠의 첫번째 오리지널 드라마다. 오티티라는 게 그렇다. 한 달 이용료 1만원은 그리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세계는 오티티 혁명을 맞이했다. 가입해야 할 서비스의 숫자도 늘어났다. 나는 현재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애플티브이플러스(TV+), 토종 오티티인 티빙, 왓챠에 모두 가입한 상태다. 미디어에 대한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라 어쩔 도리 없는 소비다. 당신은 그렇지 않다. 그 모든 오티티에 가입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망설이는 처지다. <한국방송>(KBS) 수신료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왓챠의 회원일 리는 없다. 그래서 가입을 해야 하냐고? 그건 당신이 이 글을 다 읽어낸 후 알아서 선택할 일이다.

&lt;시맨틱 에러&gt;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왓챠 제공

그래서 <시맨틱 에러>가 무슨 드라마냐고? ‘저수리' 작가의 웹소설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웹툰을 실사화한 비엘(BL) 드라마다. 비엘은 ‘보이스 러브(Boys Love)’의 약자다. 남자들 간의 사랑을 다루는 장르다. <시맨틱 에러>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추상우(박재찬)는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컴퓨터공학과 학생이다. 그의 앞에 갑자기 자신과는 모든 것이 다른 디자인과 선배 장재영(박서함)이 등장한다. 추상우에게 장재영은 전산학의 논리적 오류를 의미하는 ‘시맨틱 에러(Semantic Error)’ 같은 존재다. 둘은 미워하고 싸우다가 결국 사랑에 빠진다. 자, 당신은 지금쯤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퀴어 영화'라고 불리는 장르를 오랫동안 봐왔다. <시맨틱 에러>를 왜 퀴어 드라마가 아니라 비엘이라는 낯선 장르로 부르는 것인지 약간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비엘이 시작된 곳은 일본이다. 한때 ‘야오이(やおい)'라는 다소 비하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던 비엘은 동성애자 당사자들이 그려내는 퀴어 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1978년 발간된 만화 잡지 <주네>(JUNE)에서 시작된 이 장르는 소수의 여성 팬들을 위한 성적 판타지에 가까웠다. 비엘에서 실제 동성애자들이 겪는 현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순정만화풍 남성 캐릭터들이 육욕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려낸다. 비엘은 90년대 즈음 서브 장르로서의 폭발을 이루어냈다. 90년대 중반 한국에는 전설적인 미나미 오자키의 <절애>(1989)를 시작으로 비엘 해적판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도 그걸 만화방 구석에서 몰래 읽었다. 절대 표지가 드러나지 않게 감춘 채로 말이다.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비엘은 다르다. 초창기 비엘이 어둠의 장르였다면 지금의 비엘은 빛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요시나가 후미 같은 일본의 인기 비엘 작가들은 보다 현실적인 퀴어 서사를 받아들이면서 메이저로 진출했다. 한국에서 영화화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1999)와 왓챠에서 서비스 중인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2007)는 요시나가 후미의 대표작이다. 라가와 마리모의 걸작 <뉴욕 뉴욕>(1995)은 비엘과 현실적 퀴어 서사의 거의 완벽한 결합이었다. 일본 비엘이 빛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시기 한국에서는 본격적 퀴어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출발점은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2006)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후회하지 않아>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계층이 비엘 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엘은 성적 판타지를 넘어서서 보다 진중한 퀴어 서사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제 비엘과 퀴어 서사를 칼같이 구분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lt;시맨틱 에러&gt;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왓챠 제공

물론 당신은 비엘을 여전히 거부할 수 있다. 대부분의 비엘물에는 실제 성소수자들이 겪는 편견과 혐오가 제거되어 있다. 진지한 퀴어 서사를 바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장르가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퀴어 서사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판타지가 필요하다. 김수현의 <인생은 아름다워>(2010)가 한국 드라마 최초로 게이 커플의 사랑을 다루긴 했지만 주인공들은 여전히 정체성이 밝혀질까 공포에 떠는 현실에 속박되어 있었다. <시맨틱 에러>는 다르다. 커밍아웃의 공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원작 웹소설을 가득 채우던 ‘섹스'도 제거됐다. <시맨틱 에러>의 김수정 감독은 “비엘 장르를 처음 접한 사람들도 유쾌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시맨틱 에러>는 알콩달콩한 캠퍼스 연애물이라는 판타지 속에 속한 드라마다.

그게 나쁜 일인가? 비엘은 양지로 나오면서 보다 많은 대중을 위한 장르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 진화는 결국 사회적 편견을 누그러뜨리는 출발점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제이티비시>(JTBC)의 <선암여고 탐정단>이 동성 키스를 방영했다는 이유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것이 겨우 2015년이다. 레즈비언 웹드라마 <대세는 백합>도 지난 2016년 방통위로부터 ‘선량한 풍속 및 기타 사회질서 위반’이라는 이유로 시정 요구를 받았다. 겨우 6년 만에 우리는 중징계 없이 동성의 키스를 로맨틱하게 담아내는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됐다. 이건 생각보다 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다. 동시에 비엘의 출생지인 일본에서도 지금 비엘 혁명이라고 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테레비 아사히'에서 방영한 <아재's 러브>(2018)를 시작으로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2020) 같은 작품들이 비엘 드라마로서는 전례 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 한국은 비엘물의 ‘부드러운’ 영상화라는 일본의 물결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lt;시맨틱 에러&gt;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왓챠 제공

이 글을 읽고 왓챠에 가입해 <시맨틱 에러>를 볼 당신에게 미리 조언하자면, 이 드라마는 완성도가 아주 번듯한 작품은 아니다. 넷플릭스 같은 국제적 오티티의 물량 공세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는 토종 오티티가 틈새시장을 노리고 저렴하게 제조한 웹드라마에 가깝다. 그러나 <시맨틱 에러>의 성공은 시장의 틈새를 단번에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꽤 기념비적이다. 틈새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시장은 점점 커질 것이다. 예언하자면 우리는 곧 오티티뿐만 아니라 케이블과 공중파에서도 비엘 드라마를 보게 될 것이다. <시맨틱 에러>는 한국 드라마 세계의 멋진 에러다.

김도훈 작가 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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