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곽창고의 나무 부재에서 확인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톱질 흔적. 창고의 상부 평방재를 찍은 것으로, 사진 왼쪽의 부재 구멍 옆으로 비스듬하게 난 사선 자국이 켤톱을 써서 절개한 흔적이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1500년 전 삼국시대에 이 땅의 선조들은 사는 집과 창고들을 어떻게 지었을까.
백제와 신라의 최전방 국경지대였던 충북 옥천군 청성면 이성산성 유적에서 현대 장인들도 깜짝 놀랄 만한 발굴 성과가 나왔다. 당대 장인들의 건축 토목 기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6세기 초반의 대형 목곽창고가 발견된 것이다. 특히 창고터에서 무더기로 나온 나무부재들 가운데 일부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톱질 흔적이 드러났다. 당대 목수가 켤톱을 써서 부재를 자르고 다듬은 자취다. 벽판재에 활엽수 가지를 촘촘하게 붙여 습기 침투를 막는 공법도 처음 확인돼 학계의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 이성산성 터 안에서 나온 삼국시대 목곽창고 터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나무틀로 네모지게 구획된 저장공간과 공간 바닥에 내려앉은 나무 부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김석현 박사 제공
지난해 이성산성 남서쪽 구역을 발굴조사한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은 31일 옥천군 옥천읍 관성회관에서 ‘옥천 이성산성의 발굴성과와 학술적 가치’란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어 목곽창고 등의 조사 성과를 학계에 공개했다.
발견된 목곽창고는 서문터에서 남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벽판재로 둘러싼 얼개로 사방이 약 4m 규모다. 바닥 깊이는 1m를 조금 넘는데 지상 건축물의 일부로 추정되는 판재와 서까래 등이 무너진 채로 발견됐다. 내부에서는 신라 토기 조각과 대형 포유류의 뿔, 상어 뼈, 자라 등껍질, 복숭아를 비롯한 과실 씨앗 등이 다량 출토돼 제사 등에 쓰일 식재료를 보관했던 저장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목곽창고 평방재 부재의 켤톱 흔적을 확대한 사진. 김석현 박사 제공
톱을 써서 가공한 부재들은 창고 바닥의 토대목과 상부 평방재 등이다. 이 부재들에서는 켤톱을 써서 세밀하게 나무를 다듬는 ‘치목흔’이 분명하게 관찰된다. 상부 평방재의 경우 네모난 부재 구멍 왼쪽 옆으로 비스듬하게 난 사선 자국이 켤톱을 써서 절개한 흔적이다. 국내는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켤톱의 자취로 파악된다. 이전까지는 14~15세기 제작된 서울 숭례문 목부재가 가장 이른 시기의 켤 톱 흔적을 지닌 유물이었다. 무려 10세기 가까이 시기가 올라간 셈이다.
이성산성 목곽창고 터에서 나온 하부 토대목의 톱질 가공 흔적.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하부 토대목 부재나 판재도 톱질을 해서 부재의 단을 나누고 표면을 자뀌(끌)로 다듬은 흔적이 드러난다. 지난 20여년간 조사된 공주 공산성 유적, 대전 월평동 유적 등 다른 지역 저장창고터들의 나무 부재는 대개 거칠게 다듬은 흔적이 도드라진다. 이에 비해 이성산성 목곽창고 부재들은 정교하게 다듬어 끌로 깎은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유물들을 분석한 고건축사 연구자 김석현 박사는 “톱을 사용한 흔적이 고대 유물에서 나온 경우는 드문 사례다.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10세기 이전 고대 동아시아 전체에서 실물을 켤톱으로 톱질한 흔적이 나온 것은 이번 발견이 처음이어서 의미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5~6세기 삼국시대 지상 목조건축물 부재가 상당 부분 원형을 간직한 채 나온 것도 희귀하다고 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활엽수 이파리를 건축보강재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창고 바닥의 테두리 나무부재와 벽판재 외면에서 활엽수 나뭇잎들을 촘촘하게 붙이고 판재들을 이어나간 고대 건축장인들의 독창적인 조성 기법이 확인됐다. 토성을 쌓을 때 흙층 사이에 나뭇가지를 깔아놓고 축성하는 ‘부엽공법’과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습기의 침투를 막고 부재를 견고하게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창고 바닥의 테두리 나무부재와 벽판재 외면에서는 활엽수 나뭇잎들을 붙여 습기 침투를 막는 고대 건축 장인들의 독창적인 기법이 확인됐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그렇다면 나무 판재에 어떤 방식으로 이파리들을 촘촘하게 붙일 수 있었을까. 연구원 쪽은 “아교 같은 특제접착제를 써서 나뭇잎들을 붙였을 것으로 일단 추정하고 있다. 현장의 흙층과 부식된 나뭇가지들에서 접착 성분을 검출·분석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원은 충북대 나이테연구센터(센터장 서정욱 교수)와 협력해 산소동위원소측정법이란 최신 방식으로 성곽 내부 발굴 유물들의 세부 연대를 분석하는 작업도 진행중이다. 만약 분석한 연대가 5세기 말~6세기 초로 나올 경우 신라가 486년(소지왕 8년) 보은 삼년산성과 함께 지역 거점으로 쌓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굴산성’의 실체가 이성산성으로 사실상 굳어지는 양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성산성이 자리한 청성면 일원의 신라시대 옛 지명이 ‘굴현’으로 비정되고, 성 안에서 목곽창고 외에 50기 이상의 저장고 추정 구덩이, 물을 가둔 대형 집수시설 등이 드러나 갈수록 거점 성의 성격이 확연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옥천/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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