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음유시인’ 정태춘이 9일 오전 <한겨레>와 인터뷰를 앞두고 서울 마포구 문화예술기획 봄 인근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정태춘이 돌아온다.
탁월한 싱어송라이터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성취를 남긴 이 예술가가 영화와 음악으로 우리 곁을 다시 찾는다. 오는 18일 개봉하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아내 박은옥과 함께한 그의 음악인생 40여년을 갈무리한 다큐멘터리다. ‘촛불’ ‘북한강에서’를 비롯해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동진2’ 등 그의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28곡을 배경으로 정태춘이 촉망받는 가수에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콘서트 실황과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을 활용해 딱딱한 다큐가 아니라 마치 ‘정태춘 콘서트’를 보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 개봉에 앞서 전국 순회 시사회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를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 ‘문화예술기획 봄’ 사무실에서 만났다. 연출을 맡은 고영재 감독과 함께한 그는, 당분간 음악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기존의 입장에서 한결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는 “한달 전부터 곡 작업을 하고 있다”며 “노래의 의미나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를 내려놓고 내 속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음악을 기다려온 팬들에게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와 그의 신곡 작업은 더없이 반가운 소식일 터.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음유시인’ 정태춘(왼쪽)과 고영재 감독이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문화예술기획 봄 인근에서 함께 서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실 영화 찍는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당사자인데 영화가 내 얘길 어떻게 풀 것인지 걱정스러웠죠. 보고 나니 잘 만들어졌더군요. 절 미화하지 않고, 의미를 강요하지도 않고, 음악에 드라마가 잘 얹혀졌다고 생각해요.”
<아치의 노래…>는 음악영화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아카이브 영상 등을 통해 정태춘의 40여년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 독보적인 작품세계와 비타협적인 사회참여의 길을 함께 걸어온 완고한 예술가의 일대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부터 1993년 음반 사전 검열제도 철폐 운동,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까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늘 함께했던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도 기록한 것.
그는 자신의 삶과 음악 궤적에 대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고 했다. “전 한번도 스스로를 대중가수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는 연예인’ 이런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웃음) 데뷔한 다음 잘나가다가 2년 사이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에 ‘나 연예인이거든’ 하고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그것도 불편했어요. 노래는 내 의식의 변화, 인식의 확장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했어요. 내 안의 일기를 기반으로 한 초기의 자연발생적 노래에서 진보적 예술가로서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든 노래들로 옮겨갔는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일부러 방향을 튼 것도 아니었죠. 개인의 문제를 역사적 배경과 구조의 문제로 보면서부터였죠.”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뉴 제공
영화는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잘 아는 이도, 잘 모르는 이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여기에 최초 공개되는 희귀 음원과 영상은 팬들에게 선물로 다가갈 터. 정태춘 옆에 있던 고 감독은 “정태춘의 음악 전반부만 아는 이들, 후반부를 주로 아는 이들 모두에게 이것이 정태춘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노래가 내게 올 때 그것을 메모했다가 작곡을 한다”는 그는, 최근 오랜만의 곡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상업화된 음반시장에서 내 음악이 더 이상 소구될 수 없다”며 지난해까지만 해도 음악 활동을 그친 채 ‘붓글’과 시 쓰기에 몰두했던 그다. 계기는 시에서 노래로 이어지는 탐독에서 온 듯했다. 시적인 노랫말을 써온데다 실제 시집을 냈던 시인이기도 한 그가 본질적으로 노래에 해당하는 시를 통해 다시 음악을 하게 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말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출품 의뢰를 받아서 ‘사진 붓글’ 작품 <풀이 일어난다>를 냈어요. 시멘트 위에 솟아난 잡초 사진 옆에 ‘불온한 전위, 시대의 반동으로 풀이 일어난다’는 글을 붓글로 썼죠. 그러고선 뭔가 아쉬워서 <김수영 전집>을 정독했어요. 그 뒤 한국 시인들을 다시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 싶어서 <신동엽 전집>을 다 읽었죠.”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음유시인’ 정태춘이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문화예술기획 봄 벽에 붙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그즈음 우연히 간 도서관에서 눈에 확 들어온 게 밥 딜런 책이었다. “<밥 딜런 평전>과 노래집을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읽었는데, 평전이 정말 최고였어요. 탄력받아서 비틀스 가사집을 읽고, 레너드 코언 평전까지 읽고 나니 ‘이제 노래를 만들어야 할까 봐’ ‘이런 시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다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서 전기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면 노래가 됐다. “‘진지한 얘기는 끝, 기존의 정태춘은 잊어버려, 노래의 이유도 잊어버려, 트렌드도 잊어버려’ 하며 진지한 담론도 아니고 그냥 내 안에서 흘러나오듯이, 친구에게 가족에게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더러 농담으로 던질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들고 싶어요. 너무 진지하지 않게요.”
좋은 노래를 숱하게 만들어온 그지만 여전히 좋은 노래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그는 “음악을 즐겨주신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영화를 봐주셨으면 좋겠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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