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 강진희가 1888년 미국 현지에서 그린 <화차분별도>. 조선인의 손으로 그린 최초의 미국 현지 문물을 담은 풍경화다. 강 위 철교를 지나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열차들의 모습과 함께 나무숲 옆에 들어선 5층짜리 양옥풍 건물 등을 볼 수 있다. 예화랑 제공
134년 전 조선 화가가 미국에 가서 처음 그린 풍경화엔 어떤 이미지들이 들어갔을까. 놀랍게도 열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19세기 말 조선 사람이 그린 최초의 미국 풍경화가 세상에 나왔다. 1888년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를 수행한 통역관이자 화원(화가)이었던 청운 강진희(1851~1919)가 미국 현지 풍경을 먹으로 그린 <화차분별도>(간송미술관 소장)란 작품이다. 강진희의 후손인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2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 전시장에서 언론 설명회를 열어 그림 실물과 강진희의 미국 시절 사진 원본을 처음 공개했다.
1888년 워싱턴 사진관에서 찍은 강진희 사진 원본. 예화랑 소장
<화차분별도>는 강진희가 미국 워싱턴의 조선국 주미공사관에서 근무하던 당시 틈틈이 동부 볼티모어 등지를 유람하면서 증기기관차들의 질주 장면과 철제 다리 등을 관찰했다가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산으로 추정되는 종이 화폭에 전통 문인화 기법으로 근대 문명의 산물인 기차와 대형 철교 등을 표현한 구도와 필법이 이채롭다. 조선인이 미국에 건너가 최초로 그린 현지 풍경화이자 문물의 기록화일 뿐 아니라 조선인이 철도를 그린 가장 오래된 회화이자 기록물이다. 회화사적 측면뿐 아니라 근대 사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그림은 한-미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26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예화랑에서 열리는 기획전 ‘연(緣): 이어지다’에서 일반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일 예정이다. 간송 컬렉션 소장품 가운데 <화차분별도>가 있다는 사실은 1983년 5월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최초로 알려졌고, 2019년 8월 미국 워싱턴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복원 개관 1돌을 맞아 열린 ‘역사자료 특별전’에 작품의 복제본도 공개된 바 있으나 실물 전시는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는 그림뿐 아니라 강진희가 워싱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도 함께 나왔는데, 당시 재미공사관 관원들 사진 가운데 현존 유일 원본이란 점이 주목된다.
<화차분별도> 발견 사실을 알린 <동아일보> 1983년 5월21일치 기사. 당시 기사를 쓴 이용우 기자는 이후 미술계에 들어와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국제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사료는 당대 조선에서 유행한 악부 장르의 곡들을 강진희가 엮은 <악부합영>이란 노래집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판소리 연구가 취송 송만재의 <관우희>, 신위의 <소악부>에 자신이 모은 악부를 함께 엮은 것이다. 학계에서 송만재의 <관우희>는 모두 2종이 남은 것으로 전해져왔으나, <악부합영>의 발견으로 1종이 새로 추가됐다.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던 무명작가의 악부들도 상당수 담겨 조선 말기 노래 문화 연구에 소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희가 엮은 <악부합영> 표지. 예화랑 제공
글씨, 전각 등에 두루 조예가 깊었던 강진희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말년 시기에는 서화협회 회원이자 서화미술회 강사로서 미술계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생애와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예화랑 쪽은 <화차분별도> 등 공개 전시를 기념해 현대미술 작가 최종범·이귀영·변재언이 강진희의 작품을 오마주해 그린 신작도 함께 선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