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형제자매가 많은 가난한 집안의 장녀는 거의 그랬다. 가족의 생계뿐만 아니라 남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학업에 매진했던 상황과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장남의 어깨가 가벼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책임감의 종류가 다를 뿐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허기가 일상이었던 시절 수많은 장녀가 강요받았던 희생으로 가난의 그림자는 지워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녀의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다. <우리들의 블루스>의 정은희(이정은)도 그렇다.
정은희는 1녀 4남, 그러니까 장녀이자 고명딸이었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팔아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해줄 정도로 예쁜 고명딸. 목포 수학여행에서는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에게 먼저 고백하면서 가슴 설레는 추억도 만들었다. 밭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장녀로서 남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생선 장사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난 때문에 사랑과 꿈 같은 것들을 포기하고 돈만 보고 살았다. “생선 대가리를 쳐가면서, 내장을 팍팍 긁어가면서, 비닐 쳐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제주에서 알아주는 현금 부자이자 건물주가 되었다.
남동생들을 모두 공부시키고 장가까지 보낼 정도로 성공했지만, 그는 정작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한 채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들었다. “이번 생은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나 인생 쫑 나는 거로” 생각할 만큼 그의 일상 여기저기에 가난이 남긴 흔적들이 드리워져 있다.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동생들 탓이 크지만, 학창 시절 고미란(엄정화)에게 받은 상처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부잣집 딸이지만 가난한 친구들과 격 없이 지냈던 고미란의 도움을 우정으로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이 그와 고미란의 관계를 공주와 무수리로 폄하하면서 우정이라 생각했던 감정은 마음의 빚으로 변질되었다. 정은희를 하녀처럼 부리는 고미란의 자기중심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빈부 격차가 절친한 친구 사이에 봉건적 신분 질서를 부여한 꼴이다.
고미란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줄 만큼 경제적으로 성공한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친구들이 뭐라 하든, 모두가 고미란이 세번 결혼하고 이혼하면서 힘들어할 때마다 곁을 지키면서 위로했다. 그의 문자 한통에 제주에서 서울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던 날, 고미란이 자신을 “세상 만만한 따까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부 격차에서 비롯한 친구 사이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하다는 현실이 불편하고 화가 났다. 그날 이후 그는 모든 기대를 접었다.
대신 그는 “고미란한테 끝까지 의리 있게, 상처받은 거 티 내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그래서 옛날 미란이한테 진 빚 갚고, 고미란이랑 똑같은 인간은 절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제주를 찾아온 고미란을 환대하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의 태도는 가식적이다. “끝까지 의리 있는 년, 멋진 인간 소릴 듣고 싶”어 친구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너, 그닥 의리 있는 년 아니”라는 고미란의 말에 화를 내는 것도 속내를 들켰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의리’라고 외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가난은 열심히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지만, 빈곤에서 비롯한 정신적 외상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제주가 알아주는 자산가가 되었어도 정은희의 삶이 고단한 것도 그래서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여유의 밑거름이 되는 자본주의 세상이기에 그는 부자가 되어서도 가난에 잠식당한 영혼을 구원받지 못했다. 받지 않을 심산으로 친구들에게 거액을 빌려주는 그의 ‘의리’는 어쩌면 가난 때문에 받은 상처를 가리기 위한 일회용 반창고일지도 모른다. 첫사랑이 돈을 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친구들에게 호통치는 ‘우정’과 고미란에 대한 ‘우정’의 결이 다른 것이 방증이다. 고미란과 화해한 날 쓴 “그 밤, 우리에게 예전보다 더 진한 깊은 추억 하나가 생겼다”라는 일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아닌,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가 친구로 만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세상에 대해 일갈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장녀의 고단한 삶에 어두운 그림자로 내린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