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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종특 프레임’이 던진 메시지, 그리고 추리 예능의 실험

등록 2022-06-18 13:00수정 2022-06-18 15:09

최근 방영한 SBS 4부작 <검은 양 게임>
독창적 형식, ‘묵직한’ 메시지로 여운 남겨
구별 짓기 심화하는 ‘종특 문화’ 꼬집기도
심리 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lt;검은 양 게임&gt;의 한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심리 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검은 양 게임>의 한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종특’(종족 특성의 줄임말)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원래는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가상의 종족들이 지닌 차별적인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종특’을 알아야 게임을 즐길 수 있기에, 게이머들은 자신이 알아낸 종특을 공유했다. 언젠가부터는 단어의 쓰임새가 늘었다. ‘MBTI 종특’, ‘OO녀 종특’, ‘상남자 종특’ 등으로, 사람을 분류하여 딱지를 붙이는 데 쓴다. 온라인에는 여러 ‘종특’, 주로 ‘빌런’(악당)을 공유하는 글이 넘쳐난다. 비난 댓글이 줄을 잇고, 조회수가 치솟는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종특 프레임, 혹시 우리가 실제 사람을 대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진 않을까?

지난달 13일부터 6월3일까지 선보인 4부작 심리 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검은 양 게임-장르만 마피아>(에스비에스∙이하 <검은 양 게임>)도 이처럼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구분 짓고 판단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참신함이 눈길을 끈 <검은 양 게임>은 짧은 시간에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타인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추리(판단)해야 살아남는 게임을 통해, 이른바 ‘종특 프레임’을 꼬집는다.

지난 9일 서울 목동 <에스비에스> 사옥에서 만난 박경식 피디는 “종특에서 비롯한 각종 ‘OO 특’ 문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직접 만나보고 ‘아 나는 이 사람과 안 맞아’ 같은 판단을 하는 대신에,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정해둔 기준으로 판단해버리는 문화가 강해지는 것 같다”며 “이런 문제의식을 서바이벌 장르물 기획 때 떠올렸고, 마피아 게임과 섞어서 ‘검은 양 게임’이라는 새로운 포맷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lt;검은 양 게임&gt;에서 재판이 열리는 모습. 에스비에스 제공
<검은 양 게임>에서 재판이 열리는 모습. 에스비에스 제공

마피아 게임은 사회자가 제 맘대로 시민-마피아 역할을 분배하지만, 검은 양 게임에서는 ‘코드’가 흰 양과 검은 양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코드’는 제작진이 참가자 8명과 사전 인터뷰를 하며 인생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개별 특성들로, 제작진은 한 참가자당 6~7개 코드를 도출했다. 예컨대 참가자 A(유튜버 ‘호주타잔’ 석현준)의 코드는 #자퇴생 #노출증 #운동중독자 #개인주의 등이었다. 참가자 8명 중 2명만 공유하는 코드가 ‘검은 양 코드’로서, 해당 코드가 없는 나머지 6명이 흰 양이 된다. 참가자들은 4박 5일 동안 외부와 단절된 ‘검은 양 마을’에서 지내며, 매일 누군가를 ‘검은 양’으로 지목해 탈락시키는 ‘재판’을 진행한다. 최종 생존자는 1억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얻는다.

이 프로그램을 다른 심리 추리 서바이벌과 차별화하는 점은 무엇보다 검은 양 게임의 ‘코드’다. 어떤 코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때로는 재미를, 때로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거울처럼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추리 프로그램에 등장하기에는 다소 ‘용감하다’고 볼 수 있는 #LGBT(성소수자), #페미니스트 등이 검은 양 코드 후보에 오르면서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프로그램 자체가 ‘종특 문화’의 우려점, 타인을 누군가 정해둔 기준으로 판단해버리는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회 방송에서 #페미니스트 코드를 추리하는 과정에서 “남자인데 가다실(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을 맞으셔서 페미니스트인 줄 알았다”와 같은 ‘저급한’ 추리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며 기획 취지에 의문을 키우기도 했다. 연출 의도는 “풍자”였다. 박경식 피디는 “(생존 게임이) 참가자들을 몰아세우니까,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런 말들을 방송에 내보낸 건, (시청자들과 나누고 싶은) 경고의 의미였다. ‘내가 만약 저런 자리에 있으면, 나도 저런 말을 할 수도 있겠구나’ 깨닫고 조심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lt;검은 양 게임&gt;을 연출한 박경식 피디. 에스비에스 제공
<검은 양 게임>을 연출한 박경식 피디. 에스비에스 제공

참가자들이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성장하는 모습도 인상적인 부분. 참가자들이 제작진 예상보다 더 게임에 감정적으로 깊이 몰입하면서 편성이 총 3회에서 4회로 늘어났다. 박 피디는 다른 심리 추리물과 달리, 참가자의 실제 인생 경험을 소재로 한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참가자 8명 가운데 ‘국민아이돌’ 원더걸스 출신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H(가수 핫펠트 예은)는 흰 양이었지만, 가장 먼저 검은 양으로 몰려 2회에 탈락했다. 다른 참가자가 “(H가)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는 불명확한 기억을 내세운 걸 근거로, #빚쟁이 코드의 검은 양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핫펠트는 탈락 뒤 다른 참가자들에게 남기는 ‘다잉 메시지’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게임에서 겪은 일이) 제가 그동안에 받아왔던 공격들이랑 겹쳐졌던 것 같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뉴스 헤드라인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나? (판단하면 안 되지만) 하잖아요, 많이”라고 말했다. 게임에서 벌어진 일을 개인사, 사회상과 결부시킨 것이다. 핫펠트는 <검은 양 게임> 종영 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저에게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며 “검은 양 게임이 저에게 남긴 교훈은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참가자 G(방송인 정재호)는 #핵인싸(무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을 의미)를 인생 대표 코드로 지닌 인물이었으나, 방송에서는 초반부터 다른 참가자들과 어긋나 검은 양이란 의심을 가장 많이 받았다. 게임 속에서 왕따를 경험한 셈이다. 정재호는 탈락 뒤 인터뷰에서 “‘쟤네 왜 나 버리고 가지?’ ‘나도 끼고 싶다’ 이런 생각을 (살면서) 처음 해봤다. 한 번 왕따로 찍히면 이 낙인은 지울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을 탈락시킨 참가자들에게 “사회에 나가면 꼭 소수의 의견에도 귀 기울여 주세요”라고 남긴 다잉 메시지는 온라인상에서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검은 양 게임’ 참가자가 자신의 ‘코드’를 살펴보는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검은 양 게임’ 참가자가 자신의 ‘코드’를 살펴보는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박 피디는 “G(정재호)는 강남에서 자라고 유학을 다녀오고 리더 경험도 많아서 흔히 생각하는 ‘중심부’에서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도 특정 상황에서는 소수자 포지션(위치)에 몰려서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걸 보고, 왕따든 소수자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거구나, 소수자여서 소수자가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면 소수자로 몰리는 게 우리 사회의 만연한 모습이 아닐까. 그걸 보여주는 게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는 또 “‘왕따는 당할 만한 사람이 당하는 거야’, ‘왕따당하는 사람이 잘못한 게 있겠지’라는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고 말했다. 3회차에 드러난 검은 양 코드는 바로 #왕따. 참가자 8명 가운데 2명은 집단 따돌림 피해 경험이 있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미리 정해둔 각본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왕따는 누구나 겪어봤을 수 있고 누구든 앞으로 겪을 수 있는 문제, 그래서 우리의 문제고 다수의 문제”(참가자 E, 유튜버 풍자)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며 시청자들에게 큰 여운을 남겼다. 트랜스젠더 유튜버인 풍자(참가자 E)는 4회에서 어렸을 때 성 정체성을 드러냈다가 학교폭력을 겪은 일을 고백하며 “이 모든 기억이 (아직도) 아프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의 발목을 붙잡고 매일 밤 힘들게 하는 기억은 아니다”라며, “그 경험으로 또 누구에게는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다른 왕따 피해 생존자들을 위무하는 메시지였다.

검은 양으로 몰려 탈락한 참가자 G(방송인 정재호)의 ‘다잉 메시지’. 에스비에스 제공
검은 양으로 몰려 탈락한 참가자 G(방송인 정재호)의 ‘다잉 메시지’. 에스비에스 제공

<검은 양 게임>은 “마피아 게임을 가장한 사회실험”(정재호)이라는 참가자 말처럼, 비록 시청률은 낮았지만 오락 프로그램에 뚜렷한 주제 의식을 담아냈다는 점이 의미 있고 신선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추리물로서의 긴장감, 재미와 의미의 적당한 혼합 비율은 고민 지점이다. 4부작을 다 봐야 기획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제작진이 정한 코드가 자칫 편견을 더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 피디는 “고민을 많이 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게 있을 수 있지만 다음 시즌을 위해 보완할 점, 개선할 점도 준비 중”이라며, “특수한 상황에 놓인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자신이 품은 편견에) 좀 더 예민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검은 양 게임> 4부작은 <에스비에스> 누리집·애플리케이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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