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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다윈의 ‘종의 기원’ 학술출판 없다면, 진화생물학 교양서도 없다

등록 2022-06-25 08:00수정 2022-06-25 14:55

한문학자 강명관·출판인 이승우 대담
“불황에 학술출판부터 고사…고전·새학술서 씨마를 것”
1천만원 지원에 실비 1100만원…지원정책 현실괴리

누적된 출판시장의 불황에 따라 출판문화의 원천인 학술출판부터 고사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한겨레>는 이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출판문화에 해박한 한문학자 강명관(인문학 연구자)과 학술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인 이승우(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6월10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이뤄졌다.

강명관 한문학자(왼쪽)와 이승우 길 출판사 기획실장이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강명관 한문학자(왼쪽)와 이승우 길 출판사 기획실장이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승우  30년 동안 ‘학술출판’ 일을 해왔는 데,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출판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고 느낀다. 1980~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문학술 분야 독자층이 꽤 있었고, 시장에서도 순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체 출판시장에서 학술출판의 비중이 너무나 쪼그라들어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인문 분야의 책 목록만 봐도 95% 이상이 교양서에 그친다. 더군다나 흔히 말하는 ‘학술정책’이란 것과 결부되면서 학술출판은 정부의 어떤 견인도 없이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다.

강명관  ‘학술출판’이라 하면, 학문의 역사에서 어떤 전환을 가져온, 유의미한 저작들을 가리킨다. 예컨대 생물학, 진화생물학 분야의 교양서가 쏟아져 나오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이 없었다면 그런 책들이 애초에 나올 수가 없다. 학술출판이 모든 교양의 근거인 셈이다. 학술출판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냐는 그 나라의 지적 수준과 문화의 풍요로운 정도를 반영한다. 과거에는 지적 허영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급 지식을 숭배하고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젠 사라졌다. 이름난 출판사들이 “우리가 문화를 선도한다”며 수준 높은 저작 목록을 자랑스럽게 내놓았고, 또 그런 목록이 존중받는 분위기도 있었다. 현재 분투하고 있는 소형 출판사들이 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사회적·국가적 지원이 없으면 고전 저술의 번역·주해, 새 저술의 출간 등이 없어져 문화의 원천이 씨가 마를 것이다.

이승우  1인당 국민소득이 3만5000달러라는데, 학술출판은 전혀 그 수준에 못 미친다. 영화·음악 등 대중문화는 상업적으로 활성화되어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데, 유독 그 원천이 되는 출판 분야는 내세울 것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출간 종수는 많아졌지만 시장의 전체 규모가 절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인문학술 분야에서는 역량 있는 저자를 찾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강명관  다른 분야는 다 수준이 올라갔기에, 유독 출판만 그렇지 않은 이유를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일단 학계에 있던 사람으로서, 이른바 ‘학술정책’과 학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국가가 연구비를 지원하며 양적 성과만을 요구하고, 대학이 여기에 매달려 제 기능을 하지 않는 ‘한국연구재단 시스템’의 문제가 심각하다. 국가 연구비 지원을 미끼로 승진, 임용, 학내 연구비 지원까지 연계시켜 논문 생산, 학술대회 등을 강하게 압박하는 반면, 정작 연구의 핵심 결과물인 저작은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다. 책을 써야 할 학자들이 온통 논문 쓰는 데에만 매달리고 있어, “논문 그만 쓰고 연구 좀 해라”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10년에 걸쳐 중요한 책을 써내 상 받고 평가받아도 연구 업적은 ‘0’이 된다. 게다가 대학 자체가 그 규모를 줄이면서, 젊은 연구자들이 과거처럼 자연스럽게 대학에 흡수되지 못하고 있다. 자기 연구 주제가 아닌,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따라 ‘화전민’처럼 자리를 옮겨 다녀야 하는 실정이다. 고급 지식의 생산이 불가능하다.

이승우  출판계의 문제도 있다. 지식 생산을 선도해왔던 큰 출판사들이 학술출판에서 손을 떼는 추세다. 학술출판으론 시장에서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으니, 학문적으로 다뤄야 할 저작을 교양서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학술서를 출간할 때에도, 연구비 지원받은 원고를 거의 그대로 펴내는 경우가 많다. 과거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던 원고를 다시 펴낸 적이 있는데, 이미 출간됐던 책인데도 틀린 곳이 너무 많아 3교씩 봤던 경험이 있다. 책 자체가 아니라, 연구비 지원을 위한 증빙용으로 ‘책이 출간됐다’는 그 사실만 중요한 거다. 무엇보다 출판계에서 제대로 된 학술서를 만들 수 있는 편집자가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과거에는 대형 출판사마다 편집자를 양성하는 구조적인 체계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 사라진 듯 보인다.

강명관 한문학자.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강명관 한문학자.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승우 길 출판사 기획실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승우 길 출판사 기획실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강명관  한문학의 경우 제대로 된 학자들의 원고가 특정 편집인에게 몰리기도 한다. 희소한 언어, 전문 분야를 다루는 영역으로 갈수록 편집의 역량은 치명적이다. 학계에서도 편집의 역량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책이 얼마나 제대로 편집됐는지, 좋은 도판과 테크닉 등 얼마나 미려한 물성을 가지고 출간되는지 등을 평가하지 않고, 그저 ‘책 한권 냈다’에 그친다.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저술·편집 등의 노동에 제대로 된 대가가 따르지 않으니, 악순환이 계속된다. 학자들은 중요한 텍스트에 대한 번역·주해, 새 저작에 의욕을 갖지 않고, 출판계도 역량을 투입해 이를 제대로 펴내려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중국 청대 지식인 고염무의 문집 <일지록> 같은 경우 중국사에서 아주 중요한 저작인데, 이런 풍토에서 누가 이걸 10년에 걸쳐 번역할 것이고 누가 이걸 제대로 편집해 펴낼 것인가.

이승우  학술출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지원사업’ 정도가 전부다. 원고지 1매당 7000~1만원가량의 원고료와는 별도로, 실제 책을 만드는 생산비를 1종당 1000만원씩 출판사에 지원한다. 그런데 종잇값, 제본비, 인쇄비, 편집비 이런 비용들을 실제로 따져보니, 1100만원이 나오더라. 국가 지원사업인데, 책을 만들면 마이너스인 구조다. 그러니 참여하고자 하는 출판사 자체가 별로 없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사위원들은 전부 교수들로, 출판을 ‘아는’ 사람은 아예 포함조차 안 됐다. 4년 전 기회가 되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었는데, 별다른 기획이나 방침없이 오직 심사위원들의 임의적인 판단으로만 선정을 하는 데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심사위원이 관심 보이는 저작들만 선정되고, 관심 없거나 잘 모르는 분야의 저작들은 버려진다. “빅데이터 돌려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제 순서로 선정하자”, “영어판이 있는데 굳이 라틴어·그리스어 번역을 해야 하나” 등의 말도 들었다. 출판 관계자가 학술정책 기획 단계부터 ‘옵서버’로서라도 참여해야 최종 결과물이 제대로 나올 수 있다.

강명관  고급 교양층 자체가 무너지고 있으니 시장성 측면에서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민간에서 학술출판을 지원하는 재단 같은 것이 만들어지면 좋은데, 그것이 없다면 공공성 차원에서 다른 형태의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도서관이나 공공단체에서 학술서를 제대로 구입해줘도 학술출판이 이 정도로 내몰리진 않을 것이다. 연구재단의 경우, 사회적 신용 부족에 따라 연구 자체보다 연구비 지원에 더 힘을 쏟게 만드는 등 지나치게 관료화된 것이 큰 문제다. 논문이나 책을 쓴 다음에 그 결과물을 가지고 심사해서 지원하는 등의 새로운 지원 트랙을 신설하는 것도 방법이라 본다. 그래야 독립 연구자도 쉽게 지원받을 수 있다.

이승우  연구재단 연구비 지원사업에도 원래 출판 관련된 지원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3년 동안 1년에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인문저술지원사업’에 원래 결과물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 위한 ‘출판비’ 600만원이 책정되어 있다. 그러나 책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합당한 인식이 전혀 없어, 실제 출판비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연구 결과물이 제대로 나오려면, 토대지원사업 등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출판비를 꼭 별도 예산으로 책정하고 이를 지키게 하는 등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강명관  우리나라 사람들이 툭하면 ‘세계 최초 금속활자’ 등을 자랑하는데, 왜 지금의 지식 생산과 출판에는 이토록 무관심하고 무지한지 모르겠다. 전통적으로 국가가 지식 생산과 출판을 주도해왔던 우리나라에선 특히나 국가의 역량 투입이 결정적이다. 물론 학회가 주도해 학문 분야별로 번역이 필요한 저작의 리스트를 만든다거나, 믿을 만한 저자들과 출판사들이 어떤 ‘지적 공동체’를 형성한다거나 등 정책과 제도 말고도 여러 가지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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