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은 영화 연출을 통해 “연기 처음할 때 재미를 다시 느꼈다”며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크리컴퍼니 제공
“아직 감독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하고 민망해요. 다만 (연출을 해본 뒤) 연기할 힘을 다시 얻었어요.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졌어요. ‘어떤’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어요. 지금은 뭐든 주시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웃음)”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던 때 모습 그대로, 그는 수줍어하면서도 밝고 쾌활했다. 배우 문근영이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단편 연출작 세편을 선보이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지난 10일 오후 경기 부천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감독님’이라는 호칭에 쑥스러워하면서도 연출을 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을 ‘감격’과 ‘감동’이라는 단어로 표현해가며 생기있게 말했다.
배우 문근영이 연기와 연출을 겸한 단편영화 <심연>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문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 <심연> <현재진행형> <꿈에 와 줘>는 부천영화제 ‘엑스라지(XL) 섹션’ 상영작으로 선정돼 이날 처음으로 관객과 만났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GV) 행사를 마치고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그는 “많은 분들이 와주시고 좋아해주셔서 감사했다”며 “큰 화면으로 관객들과 함께 제가 만든 영화를 보는 느낌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심연>과 <현재진행형>은 9분, <꿈에 와줘>는 15분짜리 영화로, 모두 대사 없이 실험적이면서 예술적 영상미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문 감독이 연기까지 한 <심연>은 물속을 유영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빛을 쫓아 물 밖으로 나오려 몸부림치던 여성은 이내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때론 물속이 편안해 보이지만, 그는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화면을 180도 뒤집어서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나, 물속인지 물 밖인지 알 수 없는 몽환적 영상이 눈길을 끈다. 문 감독은 “배우로서 어떤 한계를 부쉈다고 생각했는데도 또 다른 한계에 부딪히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며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을 때 쓴 글이 <심연>의 바탕이 됐다”고 했다.
배우 정평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문근영이 연출한 단편영화 <현재진행형>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현재진행형>은 무대를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예술가의 내면을 흑백 화면의 사실적인 질감을 통해 예민하게 포착한 작품. 아무리 애써도 자신을 비추는 핀 조명으로부터 쉬이 벗어날 수 없는 남자(정평)는, 어느 순간 자신을 비추지 않는 조명에 불안해하며 그 빛을 쫒아 무대를 뛰어다닌다. 결코 그 조명을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조명이 그를 비춘다. 문 감독은 “무대에 오르는 배우의 숙명을 그리면서도 인생의 무대 위에 오른 모든 사람들의 고민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정평 오빠랑 얘기했는데 그가 ‘나는 고달프고 배가 고프지만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코로나 터지고 경제적인 문제가 이어지는 등 이런 것들은 얘기하고 싶어 했어요. 저도 배우다 보니까 공감이 가더라고요. 뭔가 내적으로 봤을 때 연기자로서 의구심이 든 순간들이 있거든요. ‘이 일이랑 나는 맞지 않는 거 같아’ 느끼는 순간이 있는데, 버리지 못하는 미련도 있고요. 공감이 됐어요. 정평 오빠의 감정선과 고민들을 중점으로 담아서 전달하려고 했어요.”
배우 안승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문근영이 연출한 단편영화 <꿈에 와줘>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꿈에 와줘>는 연인과 이별한 뒤 겪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며 그리움에 몸을 의지해 춤을 추는 남자(안승균)의 몸짓이 평온한 꿈속에 이른 것처럼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세 작품 모두 창작집단 ‘바치’가 제작했다. 바치는 문근영이 주축이 돼 만든 창작공동체로 “연기에 대한 가치관과 지향성이 엇비슷한” 배우 정평과 안승균이 참여하고 있다. 바치의 첫 번째 프로젝트 ‘나의 이야기 x 욜크(Yolk)’의 일환으로 만든 세 작품은 바치 유튜브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심연> <현재진행형> <꿈에 와줘> 세 작품을 지난해 7월부터 9월까지 매달 한편씩 만들었어요. 재작년부터 마음 맞는 셋이 ‘언제 한번 함께 일해보자’고 말만 나누다가 제가 지난해 ‘난 <심연>을 만들거야’라고 말하자, 다들 ‘우리 그럼 이제 같이 하는 거야?’ 하면서 ‘바치’가 세상에 나오게 됐어요.”
문근영 주연 영화 <유리정원>(2017) 스틸컷. 리틀빅픽쳐스 제공
<심연>과 <현재진행형>은 딱 하루 촬영했고, <꿈에 와줘>는 이틀 걸렸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려고 했어요. 꼼꼼히 따지고 준비하는 제 성격이 반영됐죠(웃음).”
문근영이 연출을 맡게 된 것은 감독을 해보고 싶다기보다는 배우로서 느껴온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됐다. “가수는 작사·작곡을 하고 댄서들은 자기의 춤을 만드는데 ‘연기자는 왜 내 이야기를 표현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자가 갖는 숙명이자 한계에서 벗어나 내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출에 도전하게 됐죠.”
‘배우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만들자’는 모토는 제작 과정에도 반영됐다. 세 작품 모두 감독이 미리 이야기를 정해 촬영한 것이 아니라, 출연 배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감독과 조율하면서 연출이 이뤄진 것이다. 토론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현재진행형>의 정평 배우와 얘기하면 옆에서 싸우는 걸로 오해했어요(웃음). 서로 생각하는 감정선이 달라서 티격태격했죠.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제가 예상하지 못한 연기가 나온 거예요. 그럴 때 정말 희열을 느꼈죠.”
혜경궁 홍씨 역할을 맡은 영화 <사도>(2015) 스틸컷. 쇼박스 제공
자비로 영화를 찍었다는 그는 “액수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엄마 펀드’가 요긴하게 쓰였다”며 웃었다. 그는 그동안의 연기 경력이 연출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콘티 그릴 때 저절로 그려져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술술술 그려지는 거예요. 물론 그림은 잘 못 그리지만(웃음).”
국내 가수들의 조용하고 사색적인 음악을 좋아하고 시간 나면 여행 다니며 사색하는 일을 즐긴다는 그에게 연출 경험은 또 하나의 힐링이 된 듯했다. 그는 “장편영화 연출 욕심은 안 낼 듯하다. 앞으로 연출 제안이 오면 스스로를 뜯어 말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배우가 원하는 연기를 해줄 때, 내가 의도한 대로 촬영 각도가 나왔을 때 짜릿짜릿했다. 연출은 계속해보고 싶다”며 미련을 못 버렸음을 내비쳤다.
김주혁과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 스틸컷. 쇼박스 제공
“영화의 모든 것들이 내 손을 거친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각본 쓰고 배우 만나고 콘티 짜고 촬영장 알아보고 편집하는 등 모든 제작 과정에 제가 관여할 수 있어 너무 재밌었어요. 연기 처음할 때 재미를 다시 느꼈죠. 연기가 힘들 때도 많았고, 언제고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연출하면서 갈증이 해소되고 연기가 더 재밌어졌어요. 앞으로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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