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시압 유적지에서 발견된 벽화 가운데 외국 사절단 행렬도에서 고구려 사절(맨 오른쪽 두명)이 보이는 벽화. 상투머리에 모자 쓰고 새 깃을 꽂은 ‘조우관’ 의 형태가 뚜렷이 보인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0> 중아시아에 간 한국의 첫 사절
1300여년전 고구려, 수·당 협공하려고 서역과 손잡아 타슈켄트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마자 시르다리아강이 한 오리 실처럼 발 아래서 사막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 지른다. 천산 산맥에서 발원해 아랄 해로 들어가는 2800여km의 장강이다. 강 건너 서남 방향으로는 오아시스 육로가 항로와 가즈런히 뻗어간다. 점점이 찍혀있는 오아시스에는 면화와 과일 나무가 듬성듬성하다. 어느새 40분도 채 안걸려 사마르칸드 공항에 착륙했다. 새 깃 모양 조우관 쓴 2명에 눈길 공항에서 직행한 곳은 사마르칸드 고고학연구소다. 어제 타슈켄트에서 소장에게 전화로 연락했지만, 토요일(7월 30일)이라 출근했을지는 좀 의심스러웠다. 고맙게도 압둘 하미드 소장과 학예연구사 등 몇 분은 2층 소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60대 초반의 학자풍 소장은 연구소 산하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발굴작업들을 간명하게 소개했다. 미진했던 이슬람 시대 이전의 유물발굴에 주력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70년 개관한 1층 박물관에는 구석기 시대 석기류를 비롯해 시대별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눈길 끄는 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각종 토기와 4세기께 로만글라스 유물이다. 로만글라스는 경주 일원에서 출토된 후기 로만글라스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오아시스 육로의 요충지인 이곳을 통해 고대 유리 용품들을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물관을 대충 둘러보고 나서 아프라시압 유적지로 향했다. 15분쯤 달리니 나지막한 아프라시압 언덕이 나타난다. 사마르칸드시 중심에서 동북방향으로 10km 떨어진 이 언덕은 기원전 6세기부터 13세기 전반 몽골군이 공략할 때까지 사마르칸드 중심부였다. 188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여기에 높은 성벽으로 에워싸인 궁전과 지하수로망을 갖춘 주택들의 자취가 확인되었다. 이 고대 도시유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언덕 들머리의 아프라시압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궁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절도다. 사실 이곳에 온 첫째 목적이 바로 그 벽화와 출토지의 현장 확인이다. 우선 벽화 전시실을 갔다. 이 박물관장도 겸한 하미드 소장은 아프라시압 발굴에 직접 참여했으며, 관련 연구서도 저술한 전문가로 설명이 명쾌했다. 몇 가지는 처음 듣는 내용이어서 주의 깊게 들었다.
사마르칸트시 동북방에 있는 아프리사압 유적지. 발굴지는 보전을 하려고 다시 흙으로 덮어 놓았으나, 발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1965년 아프라시압 도성 내성유지 23호의 발굴지점 1호실 서벽에서 7세기 후반 사마르칸드 왕 와르후만을 만난 12명의 외국 사절단 행렬이 그려진 채색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이듬해에 공개되어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벽화가 지금 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100여평 되는 전시실에는 높이 2m가 넘는 벽화가 좌·중·우 3면에 걸렸다. 40년 세월 속에 벽화는 많이 퇴색되어 어떤 것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고 소장은 하소연한다. 왼쪽 벽면은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 시집오는 결혼행렬인데, 신부는 하얀 코끼리 등 위에 올라타고, 말을 탄 시녀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그 뒤를 낙타와 말 탄 행렬이 따르고 있다. 650년께 서역과 교류는 고구려밖에 전시실 가운데 벽면에 외국 사절단 행렬도가 있다. 행렬 마지막에 서있는 두 사람이 외형과 복식, 패용물 등으로 미루어 고대 한국인 사절이며, 이 사절도가 당시 한반도-서역 사이의 공식관계를 시사해준다는 데 대해 국내외 학계가 견해를 같이 한다. 하미드 소장도 첫 정식 발굴보고서인 <아프라시압 벽화>(1975)의 저자 알리바움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이의가 없다고 한다. 우선, 지금은 분간하기 어려우나 발굴 당시 이들이 인종적으로 검은 머리칼에 밝은 갈색 얼굴을 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몽골인종임에 틀림 없다. 복식을 살펴보면 상투머리에 모자 쓰고 새 깃을 꽂은 이른바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다. 무릎을 가릴 정도의 긴 황색상의에 허리에 검은 색 띠를 두르고, 헐렁한 바지에 끝이 뾰죽한 신발을 신고 양손은 팔장을 끼고 있다. 이런 복식은 당시 국내외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대 한국인들의 복식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찬 큰 칼은 당시 한반도 삼국, 특히 고구려인들이 패용하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과 같은 모양이다. 머리가 둥그스럼하고 칼콧등이 크며 칼집에 M자형 장식이 있는 특징도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 벽화 속 두 사람이 한반도에서 온 사절임에는 틀림 없으나, 어느나라 사절인지, 즉 신라인지 고구려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하미드 소장도 해답은 당사자인 우리에게 맡긴다고 했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사절의 파견 시기가 고구려 멸망 전인가 뒤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답은 벽화 자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때까지 논자들은 이점을 소홀히 해 신빙성이 결여된 추단에 머물고 말았다. 이 벽화의 가장 왼쪽에는 머리가 잘려나간 한 인물이 걸친 외포 자락이 보인다. 여기에 세로로 16행의 소그드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 전시실 벽화에 남아있는 이 명문은 이미 심하게 닳아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이튿날 참관한 사마르칸드 역사박물관에 또렷한 원문이 전사되어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와르후만 왕이 인근 나라 축하사절과 대화하는 내용이었다. 와르후만은 중국 당대의 영휘 연간(650~650)에 강거(康居: 사마르칸드) 도독으로 책봉된 불호만(拂呼?)이므로 사절단 방문시기는 그의 재위시인 7세기 후반기의 초엽(650~655년)이다. 이 때는 고구려가 건재한 시기다. 이런 유물과 더불어 당시 고구려와 서돌궐을 비롯한 서역 제국간의 접촉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 사절의 사마르칸드 사행을 더욱 설득력 있게 긍정할 수 있다. 고구려와 서역 제국은 다같이 인접한 중국으로부터 부단한 침공을 받아 항시 위협 속에서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위협은 가중되었다. 고구려는 서돌궐을 비롯한 서역 제국과 손잡고 수·당을 동서에서 협공할 목적으로 그들과의 교섭을 꾸준히 진행했다. 고구려는 5세기 전반 평양에 천도한 뒤부터 북방 수비를 위해 후위(後魏)와 친교하면서 서역과 통교를 시작했다. 7세기 초 고구려는 수나라에 대한 공동대항책을 찾기위해 중원의 오르도스 지방에 웅거하던 돌궐 추장 계민가한(啓民可汗)에게 사신을 보냈다. 당나라 초기에도 고구려는 밀려드는 당의 침략을 맞아 자구책의 하나로 당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밀려간 서돌궐에 사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벽화의 고구려 사절도가 바로 그것을 시사해준다. 벽화 바랬지만 대외기상 전해오는듯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