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열린 ‘청와대, 한여름 밤의 산책’ 사전 언론공개 행사 때 공개된 저녁 나절의 본관. 노형석 기자
“청와대청장이 아닙니다. 저는 문화재청장입니다.”
범종 등 한국 불교공예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최응천(63) 문화재청장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미술관과 공연장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해 논란을 빚고 있는 청와대 활용 방안을 놓고 청와대 임시관리기관인 문화재청의 수장으로서 생각을 묻자 나온 답변이었다. 27일 서울 필동 한국의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는 애초 문화재청 정책 방향과 과제를 설명하는 자리였으나 이슈로 급부상한 청와대 논란 탓에 시종 청문회 같은 분위기 속에 청와대 관련 질의가 쏟아졌다.
“사실 청와대 활용과 보존 문제는 빙산의 일부분입니다. 문화재청 앞에 산적한 수많은 현안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5월 취임한 뒤로 서울 풍납토성, 울산 반구대, 김포 장릉 등 현안이 벌어지는 현장을 일일이 찾아가 현상을 파악하고 점검하는 작업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해왔어요. 두달이 훨씬 지나 이제야 기자간담회를 하는 것도 쌓인 현안들이 너무 많아서 늦어진 거예요.”
27일 낮 열린 문화재청장 기자간담회에서 최응천 청장이 현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문화유산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 사무실에서 정책을 다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형석 기자
27일 오전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열린 문화재청장 기자간담회 현장. 최응천 청장이 취재진 앞에서 문화재청의 올해 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그는 “문체부의 청와대 활용 방안과 별개로 청와대 영역에 대한 문화재청의 권한이나 관리권을 주장할 만한 상황도 아니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며 “관리 주체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보존이라는 문화재청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언론 등 일각에서 청와대 장래를 놓고 활용을 강조한 문체부와 보존을 중시한 문화재청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저희는 사실 활용보다도 지난 두달여간 몰려드는 관객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게 관리하는 데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한정된 예산과 인력으로 저희 직원들이 힘겹게 청와대를 관리해온 것만 해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기자들의 질의를 받고 답변하는 최응천 청장. 노형석 기자
취임 뒤 문화재계 현안에 대한 문화재청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정부의 문화재 분야 선발투수로 등장해 열심히 준비했는데 ‘볼’만 던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당장 닥친 여러 문화재 현안들에 대처하는 데 우선 힘을 쏟았다”고 했다. 기자들이 간담회 후반부에 다시 청와대 영역의 문화재 지정 가능성에 대해 묻자 그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풀어냈다.
“산하 궁능유적본부가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용역’을 발주해 곧 용역 계약을 맺을 것이고, 청와대 영역의 역사적 맥락을 찾는 조사 작업을 진행시킬 겁니다. 하지만 사실 청와대 영역 상당 부분이 이미 파괴된 상황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관저를 지을 때 층위가 교란되고 파헤쳐져 사적급 정도의 큰 유적이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작다고 봅니다. 근대문화유산이나 천연기념물 정도로 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활용에 큰 제약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문체부가 주도하는 활용과 문화재청의 보존 관리가 서로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포 장릉 봉분 앞에서 전방을 바라본 모습. 장명등과 재실 너머로 고층 아파트들이 장벽처럼 전망을 가로막고 들어서있다. 노형석 기자
최근 법정 싸움으로 번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김포 장릉’ 인근에 조성된 아파트 단지 건립 논란에는 “건설업계의 부당한 공사에 대해 대응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정면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최근 공사중지 명령을 취소한 법원의 1심 판결에 문화재청이 항소한 데 대해서도 “1심 판결에 문제가 많다. 2심이 어렵다고 하지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항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나라의 주요 문화유산들이 곳곳에서 주민 혹은 지자체와의 갈등으로 권위와 위상에 손상을 입는 양상이 잇따르고 있다”며 “문화재청이 좀 더 적극적이고 강한 태도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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