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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유물 속 ‘마음’에 가닿는 일…진짜로 보니 진짜로 좋네

등록 2022-08-13 14:54수정 2022-08-14 12:15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갔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명품직관’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적초의
성석에서 들리는 고구려인 목소리
젓갈 파는 여인 그린 ‘매해파행도’
서로 보살피는 삶 아름다움 흘러
조복, 조선 19세기 말, 비단, 중요민속자료,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복, 조선 19세기 말, 비단, 중요민속자료,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박물관은, 진짜는 수장고에 두고 가짜를 만들어서 전시하는 거죠?”

박물관에서 일하며 받아본 가장 놀라운 질문은 이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의외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무척 많고, 생각보다 자주 이렇게 묻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진짜 유물을 전시한다고 대답하면, 그 순간부터는 누가 더 놀랄 수 있는지 대결을 펼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이 지면을 빌려 알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박물관에서 보시는 거의 모든 유물은 진짜 문화재들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특별전 ‘명품직관’(12월30일까지)은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과 현대 작품 70여점을 선보인 전시다. 전시 제목의 ‘직관’(直觀)은 선입견 없이 직관적으로 작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글자 그대로 작품을 직접 볼 기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푹신한 녹색 카펫이 깔린 계단을 한칸 한칸 올라가 2층 전시실 문 앞에 서는 것으로 대면의 시간이 시작된다. 혹시 이른 시간 전시를 보면, 유리문이 스르르 열리며 방안의 조명이 일제히 밝아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다.

절로 나오는 ‘실물이 낫네’

전시 전반부를 차례대로 따라가다 보면 ‘실물이 낫네’ 하는 칭찬이 떠오른다. 더 자세히, 여러모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자나 받침대로 사용한 커다란 청자 윗면에는 꽃과 넝쿨무늬가 얕게 새겨져 있다. 책이나 인터넷에 소개된 사진은 대개 등나무 가구를 본떠 조각한 앞면 위주라 윗면의 장식을 자세히 볼 기회가 많지 않다. 꽃을 수놓은 방석을 깔아놓은 것 같은 아기자기한 꾸밈새에서도 고려의 화려한 미감이 물씬 느껴진다.

청자 투각 고리무늬 의자, 고려 13~14세기, 보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청자 투각 고리무늬 의자, 고려 13~14세기, 보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특히 복식 유물은 아무리 사진으로 많이 보아도, 직접 보면 그 맵시가 다르다. 옷감과 바느질, 자수, 장식의 질감과 빛깔이 한눈에 어우러져 들어온다. 그러니 옷 좀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전시실에 들어오자마자 붉은 비단으로 만든 적초의(赤綃衣)에 한참을 홀려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옷은 조선 시대 관리들이 경사스러운 날에 입던 화려한 예복으로, 섬세한 디테일이 일품이다. 아래로 드리운 단정한 주름 장식, 깃과 소매, 도련마다 두른 검은 테의 배색, 그리고 붉은 바탕색과 검은 테 사이에 2㎜ 굵기의 가느다란 노란 선을 배치해 화사함을 만들어낸 야무진 솜씨는 톺아볼수록 감탄이 나온다.

고구려 평양성 축성 기록글자, 고구려 589년, 석각, 19.5×36㎝, 보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고구려 평양성 축성 기록글자, 고구려 589년, 석각, 19.5×36㎝, 보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그런가 하면 사진으로 볼 때는 느껴지지 않던 문화재 각각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관람객에게 전해지는 유물도 있다. 고구려에서 평양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과 책임자, 공사 날짜를 기록한 성석(城石)의 일부이다. 깨어져 석고 틀로 고정해놓은 돌에는 스물일곱 글자가 남아 있다. 역사적인 의미가 큰 유물이지만, 이 돌을 눈앞에서 만나면, ‘글씨체 참 멋지다’ 하는 솔직한 첫인상이 먼저 떠오른다. 까만 자연석에 한자 한자 쪼아 남긴 글씨에는 힘과 생기가 넘친다. 1600여년 전 한 고구려인의 손길이 남긴 글씨체는 마치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처럼 사람을 대면한 느낌을 준다.

젊은 날 김홍도의 아침이 그려지고

어쩌면 직관이란 작품 속에 숨은 마음과 이야기를 눈이 아닌 마음으로 찾아 나서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전시를 보러 갈 때도 있지만, 전시실에 머무는 동안 관람객들의 마음속에는 작품과 나누는 대화가 흐른다. 이 전시에 나온 김홍도의 풍속화 한점은 작품 속 시간과 계절 속으로 마음을 잠시 옮겨다 주는 그림이다. 누렇게 빛바랜 비단 폭에 그려진 그림은 처음엔 흐리게, 그러나 가만히 살펴볼수록 또렷하게 보인다. 김홍도가 30대에 그린 <매해파행도>(賣醢婆行圖)다.

이 작품의 제목을 한글로 풀어 쓰면 ‘젓갈 팔러 가는 아낙들’, 동틀 녘부터 머리에 젓갈을 이고 바닷가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스승 강세황이 살던 경기도 안산 바닷가에서 보던 풍경에 생활을 녹여낸 이 작품에는 젊은 시절 김홍도의 눈에 새겨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경외가 가득하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고 콧등이 시어져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을 보면 볼이 얼얼해지는 겨울 아침이 마음속에 펼쳐질 것이다.

김홍도, &lt;매해파행도&gt;(세부), 조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김홍도, <매해파행도>(세부), 조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니, 그림 속 계절은 낙엽이 다 지고 난 한겨울이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이 실어 오는 바닷바람이 매섭게 쌀쌀할 것이다. 그러나 큼직한 짐을 이고 걷는 여성들은 싹싹한 생기가 도는 얼굴로 막 합류한 이를 반기며 다부지게 걸음을 옮긴다. 모두 눈썹까지 서글서글한 미소가 어려 있다. 등에 업은 아이 손이 시릴까, 젊은 어머니는 광주리를 받치고 남은 손으로 아이의 손가락을 꼭꼭 쥐어준다. 그런가 하면 나무통을 이고 앞서가던 사람은 잠시 뒤돌아서서 다른 이들을 기다려준다. 추우니 어서 가자고 재촉하지 않고, 편안히 허리를 짚고 뒤따르는 이들을 살피는 넉넉한 눈빛을 보면, 일하러 가는 이들의 얼굴에 지치고 고된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사람은 나를 보살피는 눈길이 있을 때면, 오히려 더 힘을 내고 싶어지니까.

김홍도는 이렇게 마주 봄으로써 단단히 엮인 마음을 인물들 뒤 바닷가에도 똑같이 옮겨놓았다. 이끼 낀 바위에 먼저 도착한 갈매기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료들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자연 속에 어우러진 그림 속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젊은 시절 김홍도의 하루도 새벽 일찍 시작되었겠다는 짐작으로 마음이 밝아진다. 비스듬한 아침놀을 나눠 받으며 빛났던 길 위의 사람들을 반가워하고 기억한 사람이었구나.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삶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김홍도의 그림 속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깨달을 때, 문득 그가 남긴 풍속화의 둥근 얼굴들을 다시 하나하나 들여다보러 가고 싶어진다.

문화재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한번 더 만나면 좋겠다는 옅고 따뜻한 관심과 기대로 시작된다. 사랑하기 전에 좋아지는 일, 좋아지기 전에 조용히 직접 바라보는 일. 방학과 휴가, 먹고사는 일에서 잠시 놓여나는 이런 계절엔 진짜와 마주 보는 일을 하러 가면 좋다.

‘명품 직관’ 전시 전경.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제공
‘명품 직관’ 전시 전경.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제공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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