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저체중으로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몸 일부를 드러낸 채 카메라 앞에 섰다. 노르웨이의 사진작가 레네 마리 포센이다. 그는 10살 때부터 섭식장애의 일종인 거식증(신경성 식욕부진증)을 앓았다. 어떤 음식도 먹지 않고, 음료 형태만 취한다. 그는 사진을 익히고 난민 등 타인들을 촬영하면서, 자신을 바라볼 용기를 얻는다. 앙상한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담아낸 작품들을 대중 앞에 내놓는다. 그의 전시를 찾은 여성 관객들은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 해주길 바랐다. 감사하다”며 눈물짓는다.
‘이비에스국제다큐영화제(EIDF) 2022’에서 선보이는 노르웨이 다큐멘터리 <자화상>은 사진작가 레네의 일대기를 담은 작품이다. 올해 ‘이아이디에프’ 선공개작이다. <자화상>이 담은 메시지와 태도가 ‘이아이디에프’의 지향과 닮았다.
<자화상>은 거식증을 단순한 정신질환으로 취급하지 않고, 레네가 어떻게 거식증을 ‘생존전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지, 십수 년을 거쳐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거식증과 ‘공생’하고자 어떻게 분투하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거식증에 투영된 시대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환자이자 예술가인 개인의 행복과 존엄성을 놓치지 않는다.
올해로 18회를 맞이한 ‘이아이디에프’에는 이처럼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문제를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고뇌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24개국 63편의 작품이 마련됐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만 가득한 건 아니다. 삶의 아이러니에서 비롯되는 유머와 일상의 희로애락을 골고루 포착했다.
또한 ‘이아이디에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장과 티브이(TV)에서 동시 진행되므로, 코로나 재유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교육방송1>(EBS1) 채널이 22~28일 넷플릭스 등 오티티(OTT) 못지않은 ‘다큐 맛집’으로 변신한다. 티브이 외에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에무시네마, <교육방송>의 다큐 전문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디박스’(D-BOX)에서 만나볼 수 있다.
22일 개막작 <다크 레드 포레스트>를 시작으로, 오는 28일까지 일주일 동안 펼쳐질 축제의 여정에서 함께 보면 좋을 작품들을 ‘프로그래머 추천작’ 등을 토대로 정리했다.
■고난 속 빛나는 우정과 사랑
‘이아이디에프’의 묘미는 그동안 티브이, 영화 등 한국 미디어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세계 곳곳의 이야기, 한국사회 곳곳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는 점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류나 여행지로만 소비되는 국제 소식에 지쳤다면, ‘이아이디에프’ 편성표를 들여다보라. ‘사람의 얼굴’을 한 콘텐츠, 낯선 나라 어딘가에도 사람과 사람이 맺는 우정과 연대가 얼마나 반짝이는지 보여주는 콘텐츠가 가득하다.
스페인 다큐
<가자에 띄운 편지>(티브이 27일 새벽 1시5분, 극장 27일 오전 10시)는 이탈리아 의대생 리카르도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하면서 목적지로 전쟁이 임박한 가자 지구를 선택하며 시작된다. 리카르도의 친구들은 그의 결정을 듣고 무척 놀라지만, 폭발탄 총상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는 리카르도에겐 꼭 필요한 일이다. 리카르도는 현지 및 국제 언론의 큰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전쟁이 다가오자 큰 불안을 느끼고,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리카르도를 도운 건, 전쟁의 불안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젊은 팔레스타인인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한 청년들의 이별 장면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도, 라투아니아, 한국이 공동 제작한
<아예나>(티브이 24일 밤 11시30분, 극장 26일 오후 3시50분)는 몇 년 전 얼굴에 염산 테러를 겪은 두 인도인 여성 리투와 파라하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흉터로 인해 얻은 유명세를 활용하는 리투, 테러 뒤 비혼을 선언하고 자유를 즐기는 파라하는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생존자로서 연결돼 있다. 이들이 여러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회복, 우정, 존엄이 담겼다.
이밖에도 1944년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여성의 삶을 다룬
<넬리와 나딘>(티브이 25일 새벽 0시45분, 극장 27일 오후 1시50분), 평생 광장공포증에 시달린 이웃 케이와 교류하며 그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케이의 초상화>(티브이 23일 밤 11시15분), 이성애자 여성이자 기독교인으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감독이 동성애자 남성인 친구와 쌓아가는 우정을 담은
<퀴어 마이 프렌즈>(극장 27일 오후 3시40분) 등이 마련됐다.
■‘나’를 변화시켜 사회를 바꾸는 사람들
올해 ‘이아이디에프’ 아시아 경쟁 부문 출품작 가운데서는 중동 다큐멘터리들이 약진했다. 그중 레바논 다큐
<베이루트: 폭풍의 눈>(티브이 23일 밤 9시50분, 극장 27일 오후 2시)은 레바논의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네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아이디에프’ 쪽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건으로 에너지 넘치는 이들의 투쟁도 잠시 멈추게 되지만, 영화는 이 레바논의 젊은 세대들이 좌절과 낙담 속에서도 결의하여 어떻게 앞으로 나가는지 지켜봐야 한다 말한다”고 소개했다.
2020년 ‘이아이디에프’서 단편 <아쇼>에로 인기를 끌었던 이란의 자파르 나자피 감독도 첫 장편작
<메이크업 아티스트>(티브이 25일 밤 9시50분, 극장 28일 오전 10시)를 선보여 기대를 모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주인공은 대학에 진학해 영화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자 하는 젊은 여성 미나이다. 남편은 미나의 사회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지역 관습에 따르자면 미나는 남편에게 양육권을 넘기는 것을 포함해, 남편과 이혼해주어야 한다. 다큐는 꿈을 이루고자 자기 아들도 잘 돌봐줄 남편의 새 아내를 구하러 나서는 미나의 모습 등을 재치 있게 그려낸다.
<우리의 목소리>(티브이 27일 밤 11시5분, 극장 27일 낮 12시)는 이란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 마시 알리네자드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시는 히잡 의무 착용에 저항하는 이란 여성들의 목소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대변하며 이란에서의 시위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고 가족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마다 두려움을 느낀다.
중동 최초의 여성 메탈 밴드를 만든 릴라스와 세라의 여정을 담은
<사이렌>(극장 26일 저녁 8시10분), 남아프리카 최초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밀렵 방지 부대 ‘블랙 맘바스’의 활약과 고뇌를 담은
<블랙 맘바스>(티브이 26일 새벽 0시10분, 극장 28일 오전 11시40분) 등도 만나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
2008년 중국 쓰촨성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 6천여명은 정부의 한 자녀 정책으로 대부분 외동아이를 잃었다. 중국 다큐
<두 개의 별>(티브이 28일 새벽 1시10분)은 첫 아이를 잃은 뒤 둘째를 맞이하는 경험을 공유하는 두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다큐는 애도와 우울 속에서도 둘째 양육을 통해 세대 간 트라우마를 넘어 희망을 찾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절제된 화법으로 전달한다.
한국 다큐
<잠자리 구하기>(티브이 28일 오후 1시50분, 극장 27일 오후 6시)는 감독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카메라를 들고 입시를 치르는 자신과 친구들을 기록해둔 데서 출발한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감독은 여전히 입시 때 느꼈던 원인 모를 불안을 느끼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로부터 잘 지내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는다. 이아이디에프 쪽은 “감독의 사적 다큐멘터리지만 독특한 화법으로 현 한국 사회 청년 세대를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흥겨운 음악영화로 봐도 손색없는
<샤부>(티브이 24일 오후 1시25분, 극장 28일 오전 10시)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사회주택 페이퍼클립에 거주하는 14살 샤부가 주인공이다. 바깥에서는 샤부가 사는 동네를 어둡게 보지만, 다큐는 주민 모두가 서로를 알고 돕는 사랑이 넘치는 도시로 그린다. 샤부는 할머니, 엄마, 여자친구 등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다큐는 샤부가 사랑하는 또 다른 영역인 음악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을 경쾌하게 전한다.
자세한 편성과 작품별 예고편 등은 공식 누리집(www.eidf.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