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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1500년 전 신라인 ‘머그컵’ 보시라…수수한데 세련되기까지

등록 2022-09-17 14:42수정 2022-09-18 13:50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갔다
아르카익 뷰티-삼국시대 손잡이잔

4~6세기 가야·신라 손잡이잔
비슷해 보이는 100여점이지만
색조·무늬·돌대로 드러난 개성
고졸한 아름다움 도드라져
손잡이잔, 삼국시대,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손잡이잔, 삼국시대,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서울 종로 사간동 현대화랑의 <아르카익 뷰티―삼국시대 손잡이잔>(10월16일까지) 전시회에서는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의 도기 손잡이잔을 선보인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경기대 교수가 10년 동안 모은 수백점 중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추린 것이다. 고사리처럼 끝이 돌돌 말린 것, 하트 무늬를 반으로 똑 자른 듯한 것, 잔보다도 큰 것, 잡기도 아슬아슬한 동전만한 것, 창틀 같은 네모꼴, 쫑긋 선 귀처럼 운두보다도 높이 솟은 것, 작은 새 한마리가 위에 날아와 앉은 것. 이 각양각색이 모두 1500년 전 컵에 달린 손잡이들이다.

오늘날의 머그컵을 꼭 닮은 손잡이잔은 4세기부터 수백년간 가야와 신라에서 만들어진 그릇이다. 쇳빛에 가까운 회색을 띤 그릇들은 가야의 수준 높은 도기 제작 기술을 보여준다. 가마 안의 온도를 섭씨 1000~1200도까지 끌어올린 상태에서 산소 공급을 차단해, 흙이 머금은 산소까지 불기운이 거두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릇은 더욱 치밀하고 단단해진다.

그러나 이 손잡이잔은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이들의 살림살이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새를 손잡이에 장식한 잔은 무덤에 껴묻거나 제상에 올리던 본래의 쓰임새를 뚜렷이 나타낸다. 고대인들은 새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장례를 치를 때 큰 새의 깃털을 쓰는 진한과 변한의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영혼이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 얼른 저승에 닿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진한과 변한이 있던 낙동강 유역에서 삼국시대 손잡이잔들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손잡이잔 위의 새들 역시 태어나자마자 무덤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망자의 넋을 인도하는 무거운 임무를 마치고 다시 무덤 밖으로 나온 동물들은 동그란 눈으로 산 사람들을 응시한다.

수수한 바탕 그대로의 아름다움

작은 규모라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이모저모 다양하게 라인업을 꾸리는 박물관 전시들과 달리, 이 전시는 100여점의 전시품이 한 종류임을 무기로 삼아 밀어붙인다. 전시실에 줄지어 놓인 수십점의 도기 잔들은 멀리서 볼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그 앞에 머무르다 보면 회색과 갈색, 짙은 먹색의 색조 사이에서 점차 각각의 잔에 담긴 개성이 보인다.

전시 전경. 신지은 제공
전시 전경. 신지은 제공

우선 눈에 들어오는 몸체를 빙 두른 띠 장식은 ‘돌대’라고 부른다. 돌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띠가 한 줄 들어간 것보다는 두 줄 들어간 것이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칼이나 촘촘한 빗살로 기하학적인 음각 무늬를 새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우연히 가마 안에서 들러붙은 재가 녹아 얼룩덜룩 광택이 나는 자연유약 효과도 워낙 심심하게 생긴 그릇들에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가야와 신라 사람들은 이런 장식을 모두 그릇 표면을 깎고 긁어내는 것만으로 베풀고, 투박한 결을 감출 유약이나 물감은 칠하지 않았다. 정제되지 않은 바탕을 가리지 않고 다 드러낸 손잡이잔들은 전시 제목인 ‘아르카익 뷰티’를 자연히 떠오르게 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솜씨를 부리지 않아도 예스럽고 수수해서 멋있는 이 옛 물건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손잡이잔이 지닌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전면에 내세운 점이다. 이 전시는 손잡이잔들을 “유물인 동시에 오브제”라고 소개한다. 고고학이나 역사학 분야의 전시였다면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에서 만들어졌는지, 당시 사람들의 문화나 생활상은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베일에 가려진 고대사에 대한 복잡한 추측도, 전시품의 이름 소개도 과감히 건너뛴다. 알파벳과 이음표, 숫자로 이루어진 작은 라벨 속 일련번호는 관람객에게 어떤 작품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전시실 안에 들어온 관람객이 해야 하는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눈으로 보는 것뿐이다. 선명한 주황색을 말끔하게 입힌 삼각형 받침대 위에 놓인 손잡이잔은 기우뚱한 형태와 거무스름한 바탕색, 깔깔한 잡티가 한층 더 두드러진다.

손잡이잔, 삼국시대,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손잡이잔, 삼국시대,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푼크툼, 예상치 못한 기억과 감정

이 손잡이잔들은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고고학에서는 주로 낙동강 서부 지역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손잡이잔을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세상을 돌다 온 유물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정확한 정보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삼국시대 유물들과 소통할 방법으로, 이 전시는 철학가 롤랑 바르트가 창안한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슬쩍 귀띔해준다. 푼크툼은 객관적인 정보나 해석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기억에 비추어 예술 작품을 느끼는 것이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노글노글 웃는 동물 장식을 보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가 떠올라 뭉클해지는 식이다.

손잡이잔(강아지 장식), 삼국시대,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손잡이잔(강아지 장식), 삼국시대, 개인 소장, 신지은 제공

‘찔림’을 뜻하는 라틴어 푼크티오넴에서 비롯된 푼크툼은 요샛말로 무언가에 ‘꽂히는’ 것과 비슷하다. 쌩쌩 달리던 자동차 바퀴에 펑크가 나는 일처럼, 푼크툼은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오는 경험이다. 어떤 기억과 감정이 떠오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작품이 눈에서 곧장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고 나면 잘 모르는 것들도 잘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뭘 잔뜩 알아야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문화재도 사실 친해지는 방법은 마찬가지이다.

물손질 흔적이 뚜렷하게 남은 손잡이잔, 삼국시대, 개인 소장, 현대화랑 제공
물손질 흔적이 뚜렷하게 남은 손잡이잔, 삼국시대, 개인 소장, 현대화랑 제공

옛 도기에 남은 마음의 흔적

손잡이잔에서는 그릇을 만든 사람들의 손길이 보인다. 비록 만듦새는 거칠지만, 빚은 뒤 손이나 나무칼 등에 물을 묻혀 표면을 다듬은 물손질 자국이 그릇마다 남아 있다. 어떤 것은 그릇을 돌려가며 손질을 하다가 칼이 배끗 튀어나간 것도 있다. 그 자리에 남은 둥근 결이 꼭 쓱쓱 빗은 숱 적은 어린이 눈썹 같아 무척 귀엽다. 바쁜 아침에 후다닥 아이 얼굴을 씻기다가도, 마지막엔 잠시 멈춰 엄지손가락으로 눈썹을 빗어주는 다정한 손끝도 떠오른다.

아무리 무심해 보여도, 마음이 깃든 손길은 모두 흔적으로 남는다. 1500년 전 질그릇을 빚던 장인의 유심한 순간들처럼 말이다. 타는 듯이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번조를 마친 가마처럼 천천히 식어가는 세계에서, 우리 일상에 새겨진 마음의 흔적들을 돌아보는 가을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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