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 1>. 웨이브 제공
올해 공개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오리지널 시리즈 중 단연 돋보이는 웨이브 <약한영웅 클래스 1>(이하 <약한영웅>)의 수확 중 하나는 배우들의 발견이다. 박지훈(23), 최현욱(20), 홍경(26). 아직 배우 이력의 초반을 달리고 있는 이들은 유수민 감독이 직접 쓴 대본에 균형 있게 배치한 각 역할의 개성을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소화해내면서 또래 배우들과의 경쟁에서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에서 세 배우를 만났다. 한준희 크리에이터가 “세 배우가 (연기를 시작한) 출신도, 발성도, 연기 톤도 다르다”고 했던 것처럼 배우들의 개성도 눈에 띄게 달랐다. 오랫동안 다양한 무대에 선 박지훈의 능숙함, 막내 최현욱이 간직한 소년 같은 생동감, 독립영화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홍경의 진중함이 각자의 언어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 “꽃미남 이미지 벗고 배우로 인정받고 싶었다” 박지훈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박지훈을 유심히 봤다면 귀엽고 달콤한 이미지는 이른바 ‘천상계’ 얼굴을 십분 활용한 전략이란 걸, 그가 꽃미남 아이돌 이상의 욕심을 가진 이라는 걸 알아챈 사람이 드물지 않을 것이다. 박지훈은 <약한영웅>을 선택한 이유로 “배우로 인정받고 싶었다. 귀여운 이미지가 전부가 아닌, ‘박지훈이 이런 면도 있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말 없는 연시은 역은 박지훈의 크고 깊은 눈이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수민 감독이 그에게 말해준 캐스팅 이유 역시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 <멀리서 보면 푸른 봄>(KBS2)에서의 눈빛이 시은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공허함이나 슬픔, 분노, 좌절 같은 다양한 감정을 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어요. 특별히 연구를 했다기보다 매 상황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애썼는데 대사나 몸쓰는 것보다 체력 소모가 심해서 촬영 끝나고 집에 가면 바로 기절하듯이 쓰러졌던 날이 많았어요.”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 1>. 웨이브 제공
그는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시은이 시험지 채점을 하다가 자신을 괴롭힌 영빈(김수겸)에게 독하게 달려드는 장면에서 “왜 이렇게까지 하나, 왜 이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매일 밤 집에서 혼자 삼각김밥을 먹는 장면을 찍으며 시은이 많이 외롭겠구나, ‘인강’을 듣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강사로 등장하는 엄마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부가 유일한 안식처였던 시은의 분노가 이해됐다”고 했다.
시은의 독기가 처음 드러나는 순간은 두꺼운 책으로 순식간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첫 액션이 아니라, 약 기운에서 깨어나기 위해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장면이다.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시은이 갑자기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하자 소란하던 교실이 얼어붙는다. 가장 어려웠던 장면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시은이 이 정도까지 가는 애라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대본 리딩 때도 실제처럼 때렸어요. 한준희 감독님이 ‘리딩 때부터 놀래키는 배우들이 있다’고 하더라구요.(웃음)”
어려서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며 많은 친구를 사귀지 못한 건 시은과 비슷하지만 가족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건 시은과의 결정적 차이다. “연습생 시절부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주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나도 아빠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 작품 보고 부모님이 뿌듯해 하시면서 ‘내 아들이라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시니 비로소 내가 잘했구나 느꼈습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약한영웅>의 길수(나철) 같은 악역이란다. 애교만 있는 줄 알았던 눈빛에서 반전의 분노와 좌절까지 표현했으니 언젠가 예상을 더 뒤엎는 악한의 눈빛까지 달려가보고 싶다는 욕심이다.
■ “더 배우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 최현욱
최현욱이 연기한 수호는 학원 액션물의 전형적인 히어로다. 먼저 나서지 않지만 속 시원한 발차기 한방으로 나쁜 친구들을 제압한다. 운동 잘하고, 정의롭고, 친구들에게 무심한 듯 따뜻한 소년. <약한영웅>이 주는 장르적 재미의 큰 부분이 수호에게서 나온다. “대본을 보면서 수호가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라 잘할 수 있을까, 더 걱정이 됐어요. 남자가 봐도 너무 멋지잖아요. 그래서 도리어 수호의 매력을 의식하지 않고 연기하려고 했어요.”
최현욱은 어느 촬영장에 가도 거의 막내인 자신의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많이 배웠다, 많이 배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지훈이 형은 감정의 깊이를 눈으로 표현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쉽게 나오는게 아니지 않나. 정말 프로구나 싶었다. 경이 형과는 연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내가 몰랐던 접근 방식에 대해 많이 배웠다. 형이 연기하는 범석이는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데도 감정이 화면에 가득 찬다”며 두 동료배우를 추켜올렸다. 그는 자신이 연기한 수호 캐릭터에 대해서도 “속은 단단한데 겉은 부드러운 성숙한 인물이다. 친구들을 대할 때도 늘 유쾌하고. 수호를 연기하면서 내 성격이 더 긍정적으로 바뀐 거 같다”고 말했다.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 1>. 웨이브 제공
최현욱은 고1 때까지 야구를 하다가 부상으로 그만두면서 진로를 바꿨다. “원래 영화를 좋아했는데 영화 보면 자주 울었어요. 친구들과 <군함도>를 보러 가서 오열하니까, 친구들이 제가 감성이 풍부한 거 같다고 하더라구요. 야구 그만두고 연기학원 다니다가 예고에 편입하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죠.” 데뷔작인 웹드라마 <리얼:타임:러브>(2019)부터 <모범택시> <라켓소년단>(2021·SBS),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tvN), 그리고 이번 <약한영웅>까지 계속 교복 입는 역할을 했다. 유치해 보이기 십상인 10대의 감성을 담백하게 표현한다는 칭찬을 받아왔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가진 운동선수 출신이지만 액션 연기는 이번이 처음. “액션 연기는 할수록 너무 재밌고 계속 배우고 싶어요. 무술감독님이 액션을 춤이라고 하셨어요. 힘이나 기술보다 상대와의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데 액션에서 배울 수 있는 호흡이 있는 거 같아요. 수호는 격투기 선수 출신이니까 스파링 연습도 많이 했어요. 그 과정에서 고조되는 감정들이 눈빛과 에너지가 되더라고요.” 그가 올해 자신에게 주는 점수는 100점 만점에 150점. 내년 목표는 “더 잘하는 것”이라고 수호처럼 단순명쾌하게 답했다.
■ “범석의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싶었다” 홍경
홍경은 “진중하다” “정석처럼 연기한다”는 평가에 쑥스러워하며 “저 그렇게 진지하지 않은데”라고 웃으면서도 질문에 답을 꺼내는 내내 신중했다. 그가 연기한 범석에 대한 시청자들의 이해가 자신의 ‘해설’로 인해 갇히는 걸 경계했다. “대본을 받아보고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하기에는 레이어가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 자신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지점이 많아서 매혹적이면서 두려웠죠.”
범석은 <약한영웅>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이다. 그렇게 갈망했던 관계, 따사롭고 끈끈한 우정이 만들어진 순간 파열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자신의 마음을 범석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범석은 10대의 정서에 가장 다가간 캐릭터이기도 하다. “누군가 했던 말인데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냥 하는 거다.’ 부연한다면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거 같아요. 이번 연기도 준비했다기보다는 범석이를 들여다보고 어떤 일말의 모습이라도 발견하려고 했죠.”
범석을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홍경은 “범석이 가졌던 느낌에 다가가보려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10대가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이 자라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거잖아요. 범석은 집과 학교에서 원치 않는 타인의 개입을 당하는 상황이 많은데 거기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아렸어요.”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 1>. 웨이브 제공
홍경은 한양대에서 연극를 전공하고 독립영화부터 시작한 경력이라 다른 두 배우와 비교해 ‘정통파’라는 말을 듣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연기의 정통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순간의 솔직함,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마주할 때의 솔직함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캐릭터를 이해하거나 소화한다기보다는 그에게 다가가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제일 어렵기도 하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영화광으로 성장한 건 틀림없어 보인다. 좋아하는 감독이나 영화에 대해 묻자 눈을 반짝이고 목소리가 한톤 올라가면서 폴 토머스 앤더슨, 베넷 밀러, 마이크 밀즈, 이마무라 쇼헤이 등 영화인과 작품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냈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고2 말쯤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게 출발점이었다. 2017년부터 드라마와 영화 단역부터 경력을 쌓아오며 지난해에는 영화 <결백>의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앓는 주인공 동생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홍경은 <악한영웅>이 “온 마음을 다 쏟은 작품”이라고 했다. 그것은 범석이라는 쉽지 않은 캐릭터, 순간순간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만 보는 이를 아프게 하는 범석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범석이 곁에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단다. “나는 아직도 너를 잘 모르겠다. 그런데 네 옆에서 네 손을 잡고 서있으려고 노력했어.” 캐릭터에 대해 이토록 조심스러운 진심이, 배우 홍경이 앞으로 도전해나갈 차기작들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