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조상들이 이걸 돈 주고 샀을까? 아님 다른 것들처럼 훔쳤을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와칸다 사람’인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가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서아프리카 전시실에서 유리창 너머 전시품을 가리키며 백인 학예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2018년 개봉한 영화 <블랙팬서>에서 식민지배의 유산을 안고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쾌감’을 선사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블랙팬서>는 마블 영화 가운데서도 남다른 정치적 색채를 띤다. 마블 영화 최초로 흑인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데, 이 슈퍼히어로는 가상의 나라 ‘와칸다’의 통치자이자 수호신이다. 마블은 자신의 흑인 정체성에 기반한 영화를 만들어온 1986년생 청년 감독 라이언 쿠글러에게 연출을 맡겼다. 쿠글러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시스템 속에서도 주인공과 조연 90%를 흑인 배우로 채웠으며, 이전부터 자신과 함께 일하던 스태프들을 영입해 미술·음악·의상 등에서 흑인 문화를 섬세하게 구현했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두 슈퍼히어로. 슈리 역할을 맡은 러티샤 라이트와 네이머 역할을 맡은 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의 모습. 마블 유튜브 갈무리
최근 개봉한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블랙팬서2>)는 전편에 이어 쿠글러가 감독을 맡고, 그의 ‘사단’이라 할 수 있는 주요 스태프들이 참여했다. <블랙팬서2>의 전체적 만듦새는 1편에 못 미치더라도, 문화다양성은 확장된 측면이 있다. 새로운 안티히어로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가 등장하는데, 영화는 원작 코믹스에서 네이머가 아틀란티스인과 인간의 혼혈이라는 설정과 달리 마야·아즈텍 등 메소아메리카(중앙아메리카) 문명을 끌어온다.
네이머는 가상의 나라 ‘탈로칸’의 리더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탈로칸은 16세기 유럽의 중앙아메리카 침략과 전염병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이 육지를 떠나 깊은 바닷속에서 500여년 일궈 온 나라다. 원주민 일부가 신이 내린 특별한 약초를 먹고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덕분이다. 바닷속에서 비브라늄을 발견해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탈로칸은, 심해 속에 숨은 ‘제2의 와칸다’라고 할 수 있다. 탈로칸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도 와칸다와 같다.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후예인 1세계 국가 리더들을 믿지 못해서다.
<블랙팬서2>는 비백인 원주민 문화를 다양성이란 명분으로 나이브하게 소모하는 대신, 식민 지배와 저항의 역사로 영화 서사 속에 새겨 넣는다. 전편에서 히어로무비에 흑인 문화를 섬세하게 입혔듯이, 이번에는 마야·아즈텍 문명에 대한 존중을 배우, 의상, 음악, 언어 요소 등으로 표현한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새로운 히어로 네이머 역할을 멕시코 배우 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가 맡았다. 멕시코 원주민 뿌리를 이어받은 이 배우의 이름 ‘테노치’는 중앙아메리카 토착어인 나와틀어에서 유래했으며, 14세기 아즈텍 지도자의 이름과 비슷하다. 메히아는 멕시코 사회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비판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해왔다. 메히아는 영화 개봉 뒤 미국 <엔비시>(NBC) 인터뷰에서 “멕시코에서 텔레비전이나 광고를 보면 거의 모두 백인이라, (멕시코가) 마치 스칸디나비아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라틴아메리카, 특히 멕시코에서 우리(갈색 피부 사람들)는 과소재현된다”고 말했다. 메히아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멕시코의 인종차별이 식민지배의 유산임을 명확히 짚는다. “그들(식민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갈색 피부를 부끄러워하고, 원주민을 학대하고, 우리 조상을 부끄러워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탈로칸의 전사 ‘나모라’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마벨 카데나도 멕시코 배우이며, 원주민 일부인 나와인이기도 하다. 또 다른 탈로칸 전사 ‘아투마’ 역할도 베네수엘라 출신 배우 알렉스 리비날리가 맡았다. 리비날리는 10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라틴계 미국인 일부를 대표할 기회를 준 쿠글러 감독에게 감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미국 UCLA가 낸 ‘2022 할리우드 다양성 보고서’를 보면, 미국 인구의 18.7%는 라틴계지만 영화 속에서 주요 역할을 맡은 라틴계 배우는 8%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아프리카계 배우가 15%이상인 것과 견줘도 작은 수치다.
탈로칸 전사 아투마 역을 맡은 알렉스 리비날리
1편에서 와칸다인들은 영어와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코사어를 사용하는 설정으로 나온다. <블랙팬서2>에 등장한 탈로칸인들은 영어와 유카텍 마야어를 함께 쓴다.
<블랙팬서2> 오에스티(OST)에는 마야어로 만들어진 ADN 마야 콜렉티보(ADN Maya Colectivo)의 곡
Laayli' kuxa'ano'one이 포함되기도 했다. 네이머와 탈로칸 문화를 상상하며 이 곡을 만든 래퍼 빠뜨 보이(Pat Boy)는 마야문화를 보존하고자 2009년부터 마야어로 된 랩 음악을 발표해왔다. 그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 퀸타나 루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마야어를 쓰다가 7살에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스페인어를 배웠다.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그와 같은 원주민 청소년들이 마야인 뿌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마야어 랩을 만든다고 밝혔다. 그의 실명 일부이기도 한 빠뜨(Pat)는 19세기 유카탄 반도에서 백인 식민주의자들과 맞서 싸운 마야원주민 지도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음악감독은 전편에 이어 <블랙팬서2>에서도 루드비히 고란손이 맡았다. 그는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멕시코시티에 2주 동안 머무르는 등 중앙아메리카를 여행하며 음악 고고학자들을 만나고 전통 악기 수백 가지를 접했다고 밝혔다. <블랙팬서2>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곡은 리한나를 6년 만에 컴백하도록 만든
‘리프트 미 업’(Lift me up)이다. 채드윅 보즈먼을 추모하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영화를 본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인기를 끈 곡은
‘콘 라 브리사’(Con la Brisa)다. 네이머가 슈리(러티샤 라이트)에게 바닷속 탈로칸을 구경시켜주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깊은 물속에서도 산들바람이 부는 것 같은 감미로운 분위기가 탈로칸의 평화로운 일상 모습과 어우러져 수중 도시의 아름다움을 부각한다. 고란손과 멕시코 가수 Foudeqush가 함께 작업했다.
국내에서 탈로칸인들의 인사법은 예능 프로 <무한도전>의 상징적 손짓을 연상시킨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이 인사법이 메소아메리카 문화의 옛 문서들에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트위터 갈무리
개봉 3주차를 맞은 <블랙팬서2>의 국내 관객은 23일 기준 누적 182만여명을 기록했다. 전편이 개봉 3일 만에 관객 175만여명을 모으고 5일 만에 300만명을 넘긴 것과 견주면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다. 미국 박스오피스 모조는 <블랙팬서2>가 22일 기준 미국에서 누적 3억300만 달러(약 4000억원), 전 세계 누적 5억6000달러(약 7450억원)를 벌어들였다고 집계했다.
<블랙팬서2>는 전편보다 평가가 엇갈리고 흥행도 부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이머와 탈로칸으로 대표되는 히어로영화 속 메소아메리카 문명 재현의 의미, 배우 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가 불 붙인 미디어의 라틴계 피부색 차별 문제에 대한 토론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메히아는 곧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책 <브라운 프라이드>(Orgullo prieto/Brown Pride)를 출간할 예정이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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