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령> 스틸컷.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고립된 공간에 호출된 5명의 용의자. 범인은 누구일까? 이해영 감독이 내놓은 신작 <유령>은 중국 외딴 성에서 항일운동 스파이를 색출하는 내용의, 중국 작가 마이자의 추리소설 <풍성>이 원작이다. 하지만 전작 <독전>에서 반전의 반전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준 감독답게 시작부터 원작의 전형적인 밀실추리극을 크게 비튼다. 영화는 정체를 숨긴 스파이 ‘유령’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유령은 자신이 유령임을 들키지 않으면서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용의자들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르고, 유령마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유령의 존재를 의심하는 상황이 된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의 경성. 신임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이 조선총독부에서 암약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흑색단 조직원의 총독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카이토는 유력한 유령 용의자 5명을 고립된 건물로 불러들인다. 한때 카이토의 경쟁자였지만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으로 밀려난 쥰지(설경구)와 암호문 기록 담당 차경(이하늬), 암호 해독 담당 천 계장(서현우), 통신과 직원 백호(김동희), 그리고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가 그들이다.
영화 <유령> 스틸컷.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유령>의 이야기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유령을 잡아내려는 카이토와 용의자 간, 그리고 용의자들끼리의 의심과 단서 찾기가 중심이 되면서 첩보극의 긴장감을 이어간다. 이야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유령의 윤곽은 수면에 떠오른다. 즉 영화의 본령은 유령 찾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후반부는 모습을 드러낸 유령이 겹겹이 둘러싼 일본군들을 물리치고 철옹성 같은 건물을 탈출해 동료를 구출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극적인 액션이 화면을 압도한다. 물밑 암투가 벌어지는 외딴 성과, 수면 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공회당으로 전반부와 후반부의 공간이 거울처럼 겹치는 <유령>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반부다.
영화 <유령> 스틸컷.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5명의 용의자들은 각자의 비밀과 사연을 품고 있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박차경이다. 그는 전임 총독에게 비행기를 선물할 정도로 엄청난 조선 재력가의 딸이지만 자신만의 신념으로,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싸우는 인물이다. 박차경을 연기하는 이하늬가 보여주는 액션은 통상적인 여성 액션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폭발시킨다. 영화 막바지에서 박차경이 상대방과 일대일로 치고받는 육박전은 액션에 있어 성의 경계를 허물면서 통쾌함을 넘어 압도감으로 다가온다.
영화 <유령>을 연출한 이해영 감독.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16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이해영 감독은 영화를 구상할 때부터 이하늬를 중심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이 감독은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중심을 가진, 그릇이 큰 사람의 느낌을 가진 인물을 고정시켜놔야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느낌의 인물은 이하늬밖에 없더라”고 했다. 대신 이하늬가 가진 기존의 화려하고 밝은 이미지는 최대한 눌렀다. 액션 연출도 통상적인 방식을 뒤집었다. “여성 액션을 잘 찍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여성 액션을 떠올릴 때 동반되는 섹시함이나 여성스러움을 배제하고 싶었다. ‘여성이어서’ 또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달지 않는, 성별 대결이 아닌, 몸과 몸이, 기와 기가 부딪쳐 땀 냄새, 피 냄새가 물씬 났으면 했다.”
영화 <유령> 스틸컷.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감각적인 공간과 색감 연출이 또 하나의 볼거리다. 영화 초반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하는 극장 접선 장면, 등장하는 장면마다 1930년대 ‘모던걸’의 화려한 옷차림을 뽐내는 유리코가 드레스를 찢을 때 쏟아지는 비즈들의 반짝임, 영화 막판 결투 장면에서 엄폐물처럼 쓰는 웅장한 커튼의 색감 대비 등이 시각적 즐거움을 끌어올린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