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당시 공연 모습. 액세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최고라는 찬사는 가려서 써야 한다. 남발하다 보면 평가의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력이 숫자로 정확히 기록되는 스포츠 스타들은 최고를 가리기 쉽다. 우리 시대 최고의 축구선수가 메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타니의 성적을 보면 현재 최고의 야구선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농구에서는 마이클 조던이 역대 최고일 테고. 기록 못지않게 취향이 반영되는 대중음악 분야는 최고를 가리기 어렵다.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처럼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지 않는 한. 이를테면 “최고의 트로트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답이 엇갈릴 수 있다. “1990년대 최고의 팝스타”는? “1970년대 최고의 록밴드”는? 사람마다 답이 다를 수 있다.
오늘 칼럼의 주인공은 현재 최고의 미국 여자 가수임이 분명한 테일러 스위프트다. 굳이 미국이라는 국가를 한정한 이유는 영국 출신 아델 때문이다. 아델과 테일러 스위프트는 21세기 이후 최고의 여자 가수 둘일 텐데 난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10대에 컨트리 가수로 시작해 벌써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데뷔 앨범을 제외하고 모두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려놓을 정도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성도 나무랄 데 없어서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을 3번이나 차지했다. 이게 어느 정도 성과인가 하면, 팝 역사상 이 상을 3번 받은 가수는 4명뿐인데 그중 최연소 기록이 20살에 수상한 테일러 스위프트다. 놀랍게도 그는 작곡과 작사까지 직접 한다. 한두 곡 집어넣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노래를 다 혼자 만든다. 명반으로 불러도 손색없는 3집 <스피크 나우>의 경우 작사·작곡자 목록에 오직 그의 이름만이 등록되어 있다. 곡마다 편곡한 사람(혹은 팀) 이름이 여럿 붙는 요즘의 경향을 거부하는 예술가로서의 고집이랄까. 심지어 다른 가수들에게 노래를 작곡해주기도 하는 건 안 비밀. 자기관리 능력도 대단해서 1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인 지금까지 큰 슬럼프 없이 활동했다. 엄청난 수입과 조 단위 재산까지, 우리 시대 가장 성공한 연예인이기도 하다.
그의 재능과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부터는 그의 글을 소개해보려 한다. 작년 말에 나온 새 앨범의 제목은 <미드나이츠>. 단수가 아니라 복수임에 주목하자. 글재주까지 뛰어난 테일러 스위프트는 앨범을 발표하면서 직접 서문을 붙이는데, 이번 앨범의 서문이 한 편의 문학작품 같다. 서툰 솜씨로 번역하면 이러하다.
“이 앨범은 한밤중에 쓴 음악을 모은 수집품입니다. 악몽과 달콤한 꿈을 가로지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마루를 서성이던 기억들 그리고 마주쳤던 악마들도 있지요.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결국 등불을 켜고 뭔가를 찾으러 나갔지만, 아마도 자정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맞닥뜨렸던 우리 모두를 위한 음악입니다.”
2011년 당시 공연 모습. 액세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서문을 읽고 두근거렸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새 앨범은 나를 위한 음악인가? 들어보니 정말 그렇다. 불안과 권태, 근거 없는 절망과 역시 근거 없는 희망, 허무함과 그 허무함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면역반응 같은 소박한 만족 등. 이율배반적인 감정들이 이중나선처럼 꼬여 나를 휘감았던 숱한 밤들을 기억한다. 그런 초라한 밤들을, 우월함과 화려함의 결정체인 테일러 스위프트가 어떻게 이토록 잘 노래할 수 있지? 나는 믿는다. 이 정도의 음악에 담긴 감정들은 결코 가짜일 수 없다고. 그렇다. 세계 최고의 팝스타조차도 악몽을 꾸고 뒤척이고 헤매다가 결국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 새해에는 우리, 밤이 가끔 괴롭더라도 자책 말자.
테일러 스위프트는 아이유를 떠올리게 한다. 체격을 제외하면 정말 많은 면에서 닮았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직접 곡을 쓰고,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현재 최고의 가수로 군림하고 있고, 가끔 연기자로 활동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공통점이 많은데 둘 다 팬 서비스에 진심이며 남자친구가 배우라는 것까지 같다.
이번 새 앨범 중에서 한 곡만 추천하라면 ‘안티히어로’다. 자기혐오의 감정을 절절하게 고백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식의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위태로운 삶을 버텨내던 ‘지안’(아이유)의 냉소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지안도 이 노래와 같은 방식으로 위로를 선사했다. 오늘 밤 테일러 스위프트가 전하는 위로의 손길을 느껴보시길. 그리고 편안함에 이르시기를.
이재익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