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지은이 안도현 시인이 1일 오후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 자료센터를 방문해 백석이 기증한 시집 <사슴>을 펼쳐보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시인 백석(1912~1996)이 첫 시집 <사슴>(1936)을 자신의 모교인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대학에 기증한 사실이 처음 확인되었다. <한겨레>는 1일 아오야마학원 자료센터를 방문해 원형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시집 원본을 확인했다.
<한겨레>는 1일 오후 <백석 평전>의 지은이인 안도현 시인과 이 책의 일본어판 번역자인 이가라시 마키와 함께 아오야마학원 자료센터를 방문했다. 이 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백석 시인 관련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슴>은 1936년 1월20일 100부 한정판으로 서울에서 발간되었다. 아오야마대학 도서관 도서 기증 접수 대장에는 백석 시인 자신이 기증한 <사슴>을 1936년 2월22일에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우편물이 선박편에 이송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석이 시집 출간 직후 이 책을 자신의 모교인 아오야마학원대학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백석 시집 <사슴> 속표지. 아오야마학원대학 도서관 소장. 최재봉 기자
한편 이 대학 학보인 <아오야마학보>에는 학원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1935년 2월10일부터 같은 해 3월13일 사이에 기부금을 납부한 2685명의 이름과 액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백석이 자신의 본명인 ‘백기행’ 이름으로 50엔을 기증한 사실 역시 남아 있었다. 또 ‘아오야마학원 제51회 졸업증서수여식 집행순서’라는 문서에는 1934년 3월6일 오후 2시에 열린 졸업식 식순과 함께 영어사범과 졸업생 명단에 역시 ‘백기행’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석 시집 <사슴> 목차. 아오야마학원대학 도서관 소장. 최재봉 기자
백석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되어 주로 백석의 문단 동료 등에게 기증되었으나 기증받은 동료 문인들 다수가 분단과 전쟁을 전후해 월북하는 등의 사정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현재 국내에는 고려대 도서관 등에 7권 안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11월에 열린 경매에서는 이 책이 7천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아오야마학원대학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는 시집 <사슴>은 책등의 글씨가 약간 지워진 것 외에는 속지와 본문은 전혀 훼손되지 않아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안도현 시인은 “그동안 접해 본 <사슴> 시집들에 비해 보존 상태가 월등히 좋아서 책장을 넘기면서 매우 흥분되었다”고 말했다.
안도현 시인(가운데)이 1일 저녁 일본 도쿄 고서점가 진보초의 한 북카페에서 열린 <백석 평전> 일본어판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안도현 시인과 <한겨레>는 역시 아오야마학원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학생 신상 조서와 졸업생 학적부, 성적표 등을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 북한에서 러시아 문학작품을 많이 번역했는데, 아오야마학원대학 성적표에 러시아어 수강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함흥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러시아어를 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1일 저녁 7시 도쿄 고서점 거리 진보초의 한국 도서 전문 북카페 ‘책거리’에서는 <백석 평전> 일본어판 출간 기념 북콘서트가 열렸다. <백석 평전>은 2014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4만부 남짓 판매되었다. <백석 평전> 일본어판은 지난해 9월 일본의 출판사 신센샤에서 <시인 백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신센샤는 김연수의 장편 <밤은 노래한다>와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월호 관련 합동 산문집 <눈먼 자들의 국가> 등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다.
안도현 시인(가운데)이 1일 저녁 일본 도쿄 고서점가 진보초의 한 북카페에서 열린 <백석 평전> 일본어판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백석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유료 관객 20여명과 온라인으로 참가한 독자 25여명 등이 함께한 북콘서트에서 안도현 시인은 “백석은 자신의 첫 시집 <사슴>을 출간한 사실이 자랑스러워서 출간하자마자 모교인 아오야마학원대학에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원본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사슴> 초판본을 보자니 너무도 기쁘고 흥분되어서 30분 넘게 책을 쓰다듬고 넘겨보았다”고 말했다. 안 시인은 “해방과 분단 뒤 북한에서의 백석의 삶은 거의 알 수 없다. 특히 그가 60년대 초 함경도 삼수군 농장으로 하방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다 숨진 마지막 30여년의 이야기를 확인해서 평전을 보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번역자 이가라시는 “일본어로 번역된 김연수 소설 <밤은 노래한다>와 백석 시를 읽으며 백석에 관심이 생겨서 <백석 평전>을 번역하게 되었다. <백석 평전>에 이어 안도현 시인의 시선집 역시 번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안도현 시인이 <백석 평전> 일본어판 출간 기념 북콘서트가 끝난 뒤 독자에게 사인을 하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이날 북콘서트에 참가한 한 일본 독자는 최근 일본에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끈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에 소개된 안도현 시인의 시 ‘연탄 한 장’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를 질문했다. 안도현 시인은 “20대 중후반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되었을 무렵,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 하는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가 잘 되는 것이 진짜 잘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담았다. 이 작품 이전에 역시 연탄을 노래한 시 ‘너에게 묻는다’ 때문에도 ‘연탄 시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는데, 드라마 때문에 또 다른 연탄 시가 인기를 끌게 되어서 ‘연탄 시인’ 꼬리표를 떼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도쿄(일본)/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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